얼숲에서, ‘한자교육’을 두고 ‘Yong-kwan Lee’ 님과 나눈 얘기(20110217)

이른바 ‘한글컨텐츠’(?)를 연구한다는 분이 가지고 계신 생각이 너무나 터무니없어 옮겨놓습니다.

Yong-kwan Lee 어떤 명분으로도 교육을 반대해서는 안됩니다. 자라나는 어린이들은 배울 수 있는 능력이 가장 왕성할 때, 그들이 배우는 것이 무엇이든 좋고 유용한 것은 모두 배워야 합니다. 그런일로 화제를 삼고 있는 것 자체가 우습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습니까?

Yong-kwan Lee 한자는 사물을 상형화하는 문자가운데 최고의 문자입니다. 지구상에 그와 같은 문자는 없습니다. 한글이 우수하지만 그것을 대치할 수 없습니다. 물론 한자는 결코 따라올 수 없는 장점을 한글이 가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물을 개념화하는데 있어서 한글과 한자는 서로 다른 영역에서 그 역량을 발휘합니다. 한자가 정적인데 비해 한글은 동적으로 움직이는 사물과 감정의 표현을 드러낼 수 있어서 정적인 한자가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세계를 표현하는 놀라운 기적이 곧 한글입니다. 그러나 한자가 나타내는 개념을 단숨에 정리하는 역량을 한글이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냥 어린이의 두뇌와 상상력을 개발시켜주기 위해서라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 우리네 교육의 현실인데, 일부러 그와 같이 역사가 깊고 우수한 문자세계를 배울 수 있는 역량이 뛰어난 시기에 기어이 막아야 한다고 하는 이유를 듣고 싶군요…

Yong-kwan Lee 교육정책에 머무르는 교육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교육은 정책으로 좌지 우지 될 대상으로 머물 수 없습니다. 정책으로 사람을 기른다고 생각하는 생각하는 사람들이 교육을 주장하다보니, 축사 짓듯이 학교에 학생 가둬놓고 사육하는 공교육 현장만 즐비하지 않습니까. 자라나는 두뇌의 사리분별을 위해서 선현의 슬기를 있는대로 다 전해줘도 모자라는 것이 부모가 원하는 교육일 것입니다. 학교에 가둬놓지 않고 보다 자유스러우면서도 교육의 경쟁력을 잃지 않고 있는 선진교육의 사례를 얼마든지 관찰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은 교육을 숭상하는 나라이므로 대통령이 좌우지 하는 교육부의 수장이나 정당이 좌지우지 하는 교육정책은 국가 와 국민을 기만하는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교육을 일반 산업정책과 같은 수준에 두고 정당이나 인물이 바뀔 때마다 정책이니 소신이니 하면서 흔들어 대는 것은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의 연속이 아닐 수 없습니다.

Yong-kwan Lee 말과 글은 소통의 수단에서 다름이 아닐 것입니다. 소통은 나와 다른 개체와의 교류입니다. 나와 다른 것에는 말도 있고, 뜻도 있고, 문자도 있고, 소리도 있습니다. 서로 다르지 않다면 소통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가 없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중국과도 북한말과도 영어와 다른 수많은 종류의 언어들과 소통하기 위한 방법을 배우는 것일 것입니다. 소통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은 어린 시절에 길러 주어야 할 귀중한 자산의 하나일 것입니다. 영양 이 불충분하면 비타민이라도 먹이는 것이 몸에다 하는 투자인데, 하물며 정신에 풍부한 상상력을 길러줄 수 있는 언어적 영양을 일부러 불충분하게 만들자는 주장은 사실 황당한 면이 있습니다. 이 세계의 사회에서 언어끼리 서로 어울리면 그 효과가 훨씬 크게 배가 되는 양상을 보여 줍니다. 예를 들어서, 동남아 국가의 하나인 타일랜드나 캄보디아나 인도네시아에서 한국사람이 잘 알지 못하는 그들의 문자으로 작성한 프로필을 가지고 소셜네트워크에 참여하여 친구가 되려는 제안을 받아 본 적이 좀 있습니다. 그럴 경우, 그들의 글을 알지 못한 것이 미안하다기 보다는 이런 무지한 경우가 있을까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것은 상대의 입장을 배려한 행동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면이 있습니다. 즉 읽히지 못하는 것은 소용이 없는 것이 될 뿐이지요. 아무리 좋은 프로필이나 생각을 전하고 싶어도 한글만으로 써야 한다는 주장으로 아프리카사람들에게 한글로 된 설명서를 줄 수 만은 없을 터이며, 소통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사는 사회에서는 더군다나 매너가 결여된 행동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서로 다른 말이나 글이나 말소리를 익히게 되면 그 만큼의 두뇌를 개발하는 세계가 열리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두뇌의 역량에 의한 지식은 자극과 상상력에 의해서 발달이 이뤄집니다. 커나는 자녀들의 두뇌를 일부러 마비시키거나 미숙한 채로 발달을 방치할 수 있는 여지는 없애는 것이 교육의 본질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