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커피와 동양 차 – 이야기거리와 잔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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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대한민국에서 커피가 큰 인기입니다. 심지어 절에서도 차 보다는 커피를 내온다고 할 정도로…
커피는 과연 어떤 매력이 있어 이렇게 널리 퍼지게 되었을까요?

먼저 우리 나라에 커피가 널리 퍼지게 된 과정을 살펴보자면 대충 이렇습니다.(물론 제 생각입니다.)
숭늉을 마시던 버릇이 있던 차에 간편한 인스턴트커피가 널리 퍼지게 됩니다. 하지만 이 때는 커피를 즐긴다기 보다는 그냥 뭐라도 마실 거리를 찾는 것이고 단 설탕 맛을 즐기는 것에 가까웠을 것입니다. 사실 인스턴트커피는 진짜 커피 쪽에서 보자면 -거의 모든 인스턴트 먹거리가 그렇듯-그냥 흉내일 뿐 커피의 제 값어치는 결코 미치지 못 합니다.
그러는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외국 여행을 하면서 커피를 맛 보게 되고 또 가끔은 외국 커피를 들여오거나 찾아서 마시는 매니아들이 생기게 됩니다. 매니아들이나 외국에서 제대로 된 커피를 마시던 사람에게는 인스턴트 커피가 성에 차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좀 더 좋은, 제대로 된 혹은 진짜 커피 맛에 가까운 커피 맛을 찾게 되고 또 몇몇 사람들은 스스로 커피를 내려서 마시게 됩니다.
손수 커피를 내려서 마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게 꽤 쏠쏠한 재미가 있습니다.
그렇게 내려 마시다 보면 좀 더 좋은, 좀 더 색다른 맛을 찾아서 여러가지 기구를 사거나 손수 볶아 보게도 됩니다.(흔히 여느 취미생활이 그렇듯이, 처음에는 그냥 결과를 즐기는 데에만 만족하다가 점점 그 과정을 즐기게 되면서 엄청난 돈과 시간과 노력을 들이게 되는 것과 비슷한 과정이라고 봅니다.)
그렇게 과정을 즐기다 보면, 어떻게 갈고 어떻게 내리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질 뿐만 아니라 그 과정 차체가 앞서의 인스턴트를 찾던 때의 귀찮음이 더이상 귀찮음이 아니라 재미가 되게 됩니다.
처음부터(커피 맛을 제대로 모를 때부터) 내려서 마시라고 했으면 귀찮아서 찾는 사람이 별로 없었을 테지만, 이런 과정을 거치고 나서는 커피를 다루는 그 과정이 크나큰 재미요 즐거움이고 맛과 향의 일부가 되는 것입니다.

잠깐 딴 얘기를 하자면, 얼마 전까지는 뻑하면 ‘스토리텔링’이라는 말을 많이 썼습니다. 가끔은 좋은 말이다 싶으면 마구 갖다 붙이는 버릇 때문에 좀 엉뚱하게 쓰이는 일도 있었지만, 우리가 흔히 쓰던 말로 쉽게 갈음하자면 ‘이야기거리를 만드는 것’일 겁니다.
저는 이 ‘이야기 거리를 만드는 일’에 가장 좋은 보기가 바로 ‘그리스 로마 신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아다시피 그리스, 로마에는 수많은 신이 있습니다. 말이 좋아 ‘신’이지 거기 나오는 존재들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신’도 있지만 그냥 ‘귀신’, ‘잡신’ 들도 많습니다.
어떤 이는 그리스 로마의 신을 두고 ‘사람보다 더 사람 같은’이라고 젊잖게 말했지만 솔직히 말하면 거기에 나오는 ‘신’ 가운데는 말이 ‘신’이지 때로는 사람보다 더 찌질하고 밴댕이 소갈딱지-뻑하면 복수!-를 하고 또 ‘짐승에 가까운’, ‘짐승스러운’ 귀신, 잡신들도 많습니다.
이 땅별 위에 다신교를 믿고 다신 사상(여기서 얘기하고 있는 다신 사상은 좋게 말해서 다신 사상이지 오히려 ‘잡신 사상’. 물론 이 때의 ‘잡-‘은 ‘온갖’, ‘허다한’이란 뜻이지 나쁜 뜻은 결코 아닙니다. ‘잡상인’도 딱히 특정한 품목이 아니라 잡다한 물건을 파는 상인’이란 뜻인데 이게 어찌하다 ‘잡스러운 사람’을 뜻하는 느낌이 되어 버렸는지… ㅡ.ㅡ)을 가진 겨레나 그런 문화를 가진 곳은 숱하게 많은 데 어찌 하여 그리스, 로마의 잡신 사상만은 높게 처져서 그냥 ‘잡신’, 여느 ‘귀신’이 ‘신’과 같은 높이로 올라가고 그래서 세계 곳곳으로 퍼지게 되었을까요?(사실 이렇게 널리 퍼진 잡신 사상이 그리스 로마 잡신 이야기 뿐만은 아니고, 딴 보기를 들자면 인도의 잡신 이야기도 꽤 널리 퍼졌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만,…)
사실 ‘잡신 사상’ 혹은 만물에 신이 깃들어 있다는 사상이라고 하면 우리도 결코 빠지지 않습니다.
위로는 옥황상제로 부터 가까이로는 집 터를 지키주는 귀신이 있고 집(채)을 지켜주는 귀신, 또 부엌을 지키는 신, 아궁이(불)를 지키는 신이 있는가 하면 하다 못해 부지깽이, 빗자루에도 귀신이 들고 제가 어릴 때 삐져서 구석에 웅크리고 있으면 할아버지께서는 ‘구석 할마이-할머니-가 잡아 간다’고 장난을 치시곤 했습니다. 또 옛 우리 신화, 설화에서 큰 역할을 하는 마고할미가 있는가 하면, 태어날 때는 삼신할미의 점지를 받아야 했고, 죽으면 저승사자가 데려가고, 무당들은 큰 인물의 귀신을 받아들여 신통력을 얻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세계 여러 곳에, 숱하게 많은 잡신 사상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로마 신화가 우뚝 솟은 것은 바로 전체를 꿰뚫어 틀거리가 제대로 만들어 졌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 거리는 단지 모양새로써 뿐만이 아니라 재미와 흥미를 드높였다고 봅니다.

커피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그리스, 로마 잡신 얘기를 꺼낸 것은, 마치 그리스, 로마 잡신 이야기가 틀거리를 이루고 그것이 흥미와 재미를 드높였듯이, 커피를 즐기게 된 과정이 바로 문화의 틀거리를 이루고 그것이 커피에 대한 흥미와 재미를 드높이게 된 것과 비슷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그래서 요즘은 커피를 즐긴다 하는 왠만한 사람도 커피의 맛과 향, 질에 대해서 한 두 마디 씩은 다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받아들이기만 하는 자리가 아니라 스스로 즐기는 자리로 옮겨왔다고 봐야겠지요.)

그렇다면 동양의 차나 우리나라의 차는 과연 커피 만큼 맛이 안 될까요? 왜 그런 재미가 없을까요?
먼저 동양의 차는 상당히 정적이라고 볼 수 있고 이 정적인 면이 요즘 현대 생활과 거리감이 생기게 되는 까닭 가운데 하나라고 봅니다.
저는 서양의 커피는 서양화 같고, 동양의 차는 동양화(수묵화?)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딱히 서양화와 동양화라고 값매기는 것이 아니라 서로 견주자면 그렇게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커피는 좀 더 강렬한 색채와 자잘한 표현과 빈틈없는 색칠로 재미를 주는가 하면, 차는 가끔은 그린 듯 안 그린 듯한 채색과 군데군데 비어있는 여백, 하지만 깊이 보다보면 우러나오는 재미, 그리고 생각의 틈[여지]이 있습니다.

서양 커피를 두고는 이래서 좋다, 이래서 안 좋다 하는 연구들이 많이 알려져 있지만, 동양 차는 인기가 높지 않은 만큼 그런 것이 덜 알려지고 그러다 보니 연구하는 이도 적고 그러니 더욱 숨겨진 부분이 많은 듯합니다. 동양 차 역시도 알려지지만 않았을 뿐 그런 약리 작용이 큽니다. 동양 차 역시도 어디서 난 차인지, 어떻게 다룬[법제] 것인지, 언제 딴 것인지, 어떤 차 갈래인지에 따라 맛이 다르고 몸에 미치는 영향이 다르고 약리 작용 또한 다릅니다.
오히려 그냥 마실거리로서가 아니라 약이라는 점에서는 커피보다도 그 효용이 넓고 다양하다고 생각합니다만, 안타깝게도 알려진 바가 적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나 서양 커피보다 뛰어난 동양 차가 왜 서양 커피에 밀릴까요?
그것이 바로 이야기거리를 못 만들고 재미거리를 뒷받침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차-흔히 보는 ‘현미녹차’ 같은 것은 ‘대용 차’라고 하지 ‘차’에 끼이지 못합니다. 마치 제대로 된 커피를 찾는 이들에게 ‘인스턴트 커피’는 ‘커피’가 아니듯이…-를 처음 접하는 이들은 흔히 (진짜배기)’차’라고 하면 ‘다도’를 떠올립니다.
뭔가 자세를 잡고 앉아서 어떤 절차와 예절을 따르고 차를 내리는 특별한 비법이나 방식이 있는 것처럼…
하지만 흔히 말하는 ‘다도’라고 하는 것은 차를 즐기는 수많은 방식 가운데 하나일 뿐 그것이 결코 정석도, 표준도 아닙니다.
커피와 마찬가지로 누구나 쉽게 차를 내려 마실 수 있지만, 좀 더 욕심을 내자면 차를 아는 사람과 함께 마시면 나름의 맛과 재를 느낄 수 있는 것 뿐입니다.

커피가 사실 ‘커피’라고 하기에도 뭣한, 좀 심하게 말하면 가짜 커피 ‘인스턴트 커피’, 흔히 말하는 ‘다방 커피’, ‘봉지 커피’에서 시작했듯, 차 역시도 흉내만 낸 차, 가짜 차 같은 것도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어떻던지 간에 널리, 많이 즐기다 보면 그 가운데서 제 맛, 제 값어치를 찾는 사람도 생기게 마련이라고 봅니다. 그렇게 대중화된 차와 좀 더 나은 차 문화가 서로 끌며 밀며 상승작용을 하게 될 것이라 봅니다.
여튼 온갖가지로 즐기다 보면 좀더 나은, 좀더 제대로인 것을 찾게 될테고 그렇게 마당을 넓혀 가는 것이 이닐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차를 하시는 분들은 나름 고집이 있고 자존심이 있는 분들이라 이런 것을 싫어하는 편입니다. 헌데 모르긴 몰라도 제대로 된 커피를 하시는 분들이 보기에는 아마도 인스턴트 커피가 먼저 사람을 입맛을 길들이고 퍼져 나가는 것도 무척 못마땅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마침내는 커피 역시도 그 세력을 넓힐 수 있었습니다.
동양 차 역시도 제대로 된 동양 차의 맛을 지키고 개발해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쩔 수 없이-참말로 ‘어쩔 수 없이’입니다. 이는 결코 올바르다 할 수는 없지만 세상에 제대로 된 고갱이가 있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곁다리, 짜가들도 많을 수 밖에 없더라는 현실론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산이 높기 위해서는 그 봉우리만 우뚝 설 수는 없고 많은 곁봉우리들을 거느리고 수많은 자락에 하많은 흙들을 딛어야만 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그런 바탕 위에서 차의 효용과 효능이 더 많이, 더 깊이 연구된다면 단지 차가 널리 퍼지는 것 뿐만 아니라 마니아를 만들어 내는 데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
확실히 서양 커피는 기를 치솟게 하고 정(情)을 치솟게 하는 현대 생활의 리듬에 맞는 면이 있는 듯 합니다. 하지만 너무 들뜨게 되는 생활 리듬을 차분하게 해 주는 차도 큰 매력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서양 커피는 동양화 같고 동양 차는 동양 수묵화 같습니다.
서양 커피는 기가 솟구치는 어린이 같고 동양 차는 원숙한 어른 같습니다.

기를 치받아 올리고자 할 때는 커피를 마시고, 기를 가라앉히고자 할 때는 차를 마십니다.(명상은 단지 결과를 통해서 만이 아니라 가부좌를 틀고 손을 모으고 앉는 그 과정을 통해서 이미 결과를 반쯤은 얻는 것입니다.

  • 어차피 저는 커피 전문가도 아니고 차 고수도 아닙니다. 논리야 저 나름이지만 논리를 폄에 있어 비약이 있거나, 근거가 약하거나, 잘 이해가 안 되는 데가 있다면 귀띔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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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와 커피 – 문화가 사람에게 스미는 길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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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확실히 커피가 대세로 자리잡은 모양입니다. 심지어 절에 계신 스님도 커피를 내준다는 말도 있으니…^^
저는 제 동무들과 만나면 ‘차’를 가끔 마시는데, 과연 문화라는 측면에서 ‘차’와 ‘커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서양 것이다 보니 좀 더 있어 보이고 한 것도 커피를 더 널리 마시게 된 까닭도 없지 않다고 봅니다.
하지만 ‘커피’라는 ‘문화’가 널리 퍼질 수 있었던 데에는 충분히 그럴 만한, 그리고 그럴 수 밖에 없는 까닭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먼저 우리에게 있어 ‘차’와 ‘커피’를 한번 견줘 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차’라 하면 아마도 ‘다도’부터 떠올리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물론 제가 제 동무들과 차를 마실 때는 결코 그렇게 마시지 않습니다. 그냥 술 마시듯이, 커피 마시듯이 마십니다.)
차의 ‘밍밍함’과 함께 이런 절차가 차를 사람들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큰 까닭이 된다고 봅니다.

그에 견줘 ‘커피’는, 우선 우리는 가짜 커피(이른바 인스턴트 커피)를 통해 ‘커피’라는 이름-알맹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봅니다. 어릴 때 먹던 ‘소시지’와 진짜 ‘소시지’가 결코 같지 않듯이 커피 맛과 향을 낸 것과 진짜 우려낸 커피는 같다고 하기 어려운 것처럼…-을 익혀 왔고 요즘은 이런 저런 통로를 통해서 우려낸 진짜배기 커피를 맛 볼 기회가 많아졌고 그러다 보니 커피의 참맛을 느끼고 찾을 가능성이 그만큼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하다못해 저만 해도 옛날에는 커피-물론 그 때는 인스턴트 커피-를 거의 마시지 않았고 가끔은 배탈까지도 나고 그랬습니다만, 요즘은 쓰거나 맛이 색다른 커피도 제 나름의 맛을 느끼곤 합니다.(제 나름의 맛을 느낀다는 뜻이지 그렇다고 품평을 할 만큼은 못 됩니다만,…)
그리고 커피를 마시다 보면 커피콩에 따라, 볶는 법에 따라, 물을 내리는 방법에 따라서 서로 다른 맛을 낸다는 것에 흥미를 느끼고 나 역시도 한번 내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여러가지 기구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러다 보면 볶는 법이나 생산지까지 따지게 되고… 그렇게 관심을 넓히고 깊게 만들어 가게 됩니다.

이것을 ‘차’에 맞춰 보면, ‘다도’같은 턱도 없는 절차 같은 데에 얽매이지 않고, 마치 ‘인스턴트 커피’ 같은 엉터리 차도 좀 있고, 중국처럼 아무 때나 마시는 것으로 느끼다 보면 엉터리 차와 진짜배기 차의 차이를 느끼기 시작할 테고 그러다 보면 차 종류에 따라, 생산지에 따라, 우리는 방법에 따라 서로 다른 맛이 나고 심지어는 차마다 몸에 미치는 약리 작용이 서로 다르다는 것까지 알다보면 차를 물처럼, 약처럼도 마시게 될 것입니다.
결국은, 차를 너무 정통을 지키고 질을 지키려고만 하기 보다는 널리 마시다 보면 차를 느끼는 문화도 더 깊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커피도 마찬가지지만, 그것이 몸에 안 맞거나 입에 안 맞는 사람을 빼고는 차를 마시다 보면 차 역시도 내 취향도 있고 나름의 맛과 향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확실히 ‘커피’는 ‘차’에 견줘서는 젊은 사람 쪽이 더 좋아 할 만한 강렬함(?)이 있지만, ‘차’는 마치 동양화 같은 여백과 은은함이 있습니다.(가끔은 차에 따라 나름의 강렬함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만,…)

꼭두놀음[꼭두극;인형극]을 보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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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9월 스무엿새에 마지막으로 고침.

  • 흔히 이르는 ‘인형극'[꼭두놀음]을 두고 해 온 생각을 가지런히 해 볼까 합니다.(꽤 긴 글이 될 것 같습니다.)

쭉 덧붙이고 있습니다. 부디 이 글이 ‘꼭두놀음’ 바닥이 한 걸음 뜀 뛰는 기틀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글에 대한 어떠한 댓거리도 반깁니다. 고맙습니다.

# ‘인형’의 뜻매김을 두고

‘인형’(人形)은 글자 그대로 보자면 ‘사람 모양을 한 물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말이란 것이 본디 뜻 대로만 쓰는 것은 아니니 굳이 ‘사람’ 모양이 아니더라도 ‘인형’이라 쓸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짐승 모양 장난감 같은 것도 ‘인형’이라고 부르고 있다.(이와 매우 비슷한 경우로, 우리말로 ‘고니’라는 새를 일본 한자말을 써서 ‘백조’라고 부르고 있으나 그 한자 뜻하고는 다르게 검은 색도 있는 바, 이런 때에는 ‘흑백조’라는 아주 이상한 이름으로 부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요즘 예술 흐름에 따르자면 온갖 물체(오브제)를 쓰는 인형극[꼭두놀음;puppetry]도 있는데 그 물체[프랑스말: Objet]를 ‘인형’이라 부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다 보니 ‘인형극'[꼭두놀음]의 큰 영역을 차지하는 것은 ‘인형극’에 끼지 못하고, ‘인형극'[꼭두놀음]이라고 하기에는 흐릿한 영역이 ‘인형극'[꼭두놀음]에서 임자[주인] 행세를 하는 형편이 되는 것이라 본다.
아울러,

# ‘인형극’ 뜻매김과 이름을 두고

한국에서 공연되고 있는 ‘인형극'[꼭두놀음]은 옛 전통 우리 ‘꼭두각시놀음’과는 얽힘 없이 시작했다고 봐야 하지만, 사실 우리 전통 ‘인형극'[꼭두놀음]이 없었던 것도 아닌 바, 우리 전통 ‘인형극'[꼭두놀음] 뿌리를 찾고 이어 내는 것도 필요하다고 본다.

‘인형극'[꼭두놀음]은 ‘ 꼭두를 사람이 사람이 손수 조종하여[놀면서] 연출하는 공연 형태’위키백과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손수’+’조종하'[놀]지 않는 것은 ‘인형극'[꼭두놀음]으로 볼 수 없다는 생각이다.(여기에 덧붙여, ‘꼭두’와 ‘대잡이'[꼭두 조종자]의 비중도 조금 살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꼭두’ 비중이 훨씬 크다면 ‘인형극'[꼭두놀음]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꼭두’와 ‘대잡이’ 비중이 비슷해 지기 시작한다면 아무래도 ‘꼭두’가 ‘대잡이’에 쏠려 보일 수 밖에 없지 않나 싶다.)

‘인형극'[꼭두놀음]을 갈음할 이름들을 살펴 보면,

  • 인형극 :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인형’이란 뜻매김과 ‘인형’이라는 낱말에서 느껴지는 느낌-‘모양꼴'[형태]에 얽매일 수 밖에 없는-과 요즘 예술공연 흐름까지 생각했을 때 흠이 많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본 뜻을 우리 전통에서 찾아 되살릴 뿐만 아니라 새로운 흐름까지 감안했을 때 아래 이름으로 고쳐 부르는 것이 좋다고 본다.
  • 꼭두각시놀음 : 옛날 남사당패가 놀던 놀음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전통 예술에서 지금의 인형극[puppetry]에 걸맞은 이름.
  • 꼭두놀음 : 사실 ‘꼭두각시놀음’과 같은 뜻지만, ‘꼭두’라는 낱말의 뜻을 돋게 하고 또 전통놀이인 ‘꼭두각시놀음’과도 구분하며 말 흐름새도 따져 붙인 이름.
  • 덜미 : ‘꼭두각시놀음’과 같은 뜻인데 남사당놀이에서 꼭두각시를 덜미를 잡고 놀았다는 데서 나온 말.
  • 허재비놀음, 허깨비놀음, 허수아비놀음 : ‘꼭두’ 또는 ‘꼭두각시’라는 것 또한 ‘인형’과 별다를 게 없다고 하는 이들의 주장과 더불어, 일정한 모양이 없는 오브제[프랑스말: Objet]까지도 생각해서 ‘허재비놀음’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아다시피 ‘허재비’는 스스로는 움직이지 못하는 ‘허수아비’를 이르기도 하고, 실체가 없는 것이란 뜻으로 ‘허깨비’와 비슷한 뜻으로도 쓴다.)

저는 가끔 쓰는 이들도 있는 ‘꼭두놀이'(‘꼭두놀음’이 좀 더 알맞은 이름이라 봅니다.)이나 ‘허재비놀음’에 새로운 뜻까지 담아 쓰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 ‘인형극'[꼭두놀음]의 테두리

한국에서는 이른 바 ‘인형’이라고 부를 만한 것으로 하는 공연을 모두 ‘인형극’으로 부르기도 하는 현실이다.(이마저도 주체가 어느 쪽에 붙고 싶으냐에 따라 인형극으로 붙었다가 아닌 것으로 우겼다가 하는 실정이라고 본다.)
이는 공연예술 가운데서도 ‘인형극'[꼭두놀음]이라고 부르는 영역을 깊이있게 연구하고 서로 공유하는 일이 적다 보니 그냥 적당히 아무렇게나 그렇게 부르고 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인형극'[꼭두놀음]의 테두리를 또렷히 하기 위해서는 위에서 처럼 ‘인형극'[꼭두놀음] 이름을 또렷히 매기고 나서

꼼꼼하게 봐서 ‘인형극'[꼭두놀음]을 뜻 매김해 보자면,(좁은 뜻의 ‘인형극'[꼭두놀음])

흔히 장치에 의해 움직이는 오토마타는 사람이 직접 조종되는 것이 아니므로 인형극[꼭두놀음]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인형탈을 쓰고 연희를 하는 경우 이것을 인형극으로 볼 것이냐 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탈인형극, 탈연극, 탈극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탈극의 경우에는 탈을 쓴 배우나 탈인형이 극을 이끄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만, 조종자가 조종한다기보다는 사람(배우)의 움직임을 표면적으로 보여줄 뿐이라는 점에서 인형극이라 하기 어렵다는 주장이 있다.
단, 퍼레이드나 극에서 대형 인형 속에 사람이 들어가서 조종하는 경우에는 사람이 직접 조종을 통하여 표현해 내므로 인형극으로 본다.

입체적인 혹은 평면적인 인형을 가지고 놀면서 구연(口演) 등을 하는 경우다.

이 경우에도 인형이 연희에 참가한다기 보다는 단순히 스토리 전개에 이용만 되기 때문에 인형극으로 보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이와 비슷하지만 팔, 다리나 입을 조종하여

인형을 단순히 연희의 한 소품으로 쓰는 경우다.

이 경우에는 ‘인형연극’으로 구분하여 부르기도 한다.
인형 연극의 경우에는 인형이 연희에 좀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는 하나 배우이자 조종자인 사람이 주이고 인형은 표면적인 역할만 하기 때문에 인형극으로 보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물론, 예술 테두리를 칼로 자르듯 자를 수는 없는 일이라 위와 비슷하더라도 얼마나 조종하는 부분이 들어갔느냐에 따라 넓게 봐서 ‘인형극'[꼭두놀음]으로 보아야 하는 일도 있을 것이다.

# 꼭두놀음 공연을 두고

대잡이가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

가끔 일부러 대잡이를 드러내거나 혹은 대잡이가 또다른 공연 주체로 참가하는 수가 있기는 하나, 대체로 대잡이는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고 본다.
이를 위해 대잡이를 검은 막을 덮어 쓰거나 하는 일도 있으나 이도 괜찮은 수이기는 하나 특히 대잡이가 배우로써 바탕이 되어 있다면 굳이 몸을 가리지 않더라도 보는 이의 눈길이 꼭두에 머무를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본다.(그런 점에서 ‘Duda Paiva’ 공연은 무척 좋은 본보기라고 본다.) (옛날에는 제 분야만 제대로 하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요즘에 들어서는 대잡이도 배우로써의 바탕을 다진 다음에 다른 구실을 맡는 것이 큰 흐름이며 바람직한 일이라 본다. 심지어 말로써 웃기는 우스개꾼[코메디언]들도 배우로써 바탕을 다진 배우들은 다를 수 밖에 없더라…)따라서 ‘대잡이가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대잡이가 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대잡이를 느끼지 못하도록 꼭두의 비중이 커야 한다는 것이다.(하지만 안타깝게도, 특히 연기를 했던 배우가 대잡이로 나서는 경우에, 꼭두를 누르고 대잡이에게서 기가 느껴져서 꼭두놀음이 아니라 공연에 꼭두가 소품이 되는 버리는 꼴인 일이 흔히 벌어지는 게 현실이다. 꼭두놀음 바닥이 이런 것도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꼭두 대잡이들부터 연기 공부를 하셔야…^^;;)

꼭두놀음의 고갱이는 ‘보람'[상징]이다.

모양꼴에 집착하게 되는 ‘인형극’이라는 이름을 ‘꼭두놀음’처럼 바꾸자고 하는 것도 꼭두놀음의 고갱이를 살리려는 까닭도 있는데, ‘인형’이라는 모양꼴에 집착해서는 ‘꼭두놀음'[인형극]이 폭넓고 깊은 예술 갈래가 되기 어렵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것이 가장 도드라지게 드러나는 것이 ‘오브제 꼭두’라고 보는데, 오브제 꼭두를 두고도 만든 이의 보람[상징]이 제대로 전달되고 또 보는 이도 거기서 끝없는 상상이 가능해야 한다고 보는 바, 그렇지 못하고서는 (있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사진 만이 예술’이라고 우기는 것과 같다고 본다.
거진 모든 예술 갈래가 그렇듯이 보람[상징]이 풍부한 예술…

# 그 밖에 꼭두놀음에서 흔히 보는 어설픔

꼭두를 흔들어서 움직인다고 꼭두놀음이 아니다.

특히 아마추어 꼭두놀음패[인형극단]에게서 자주 보는데, 그냥 대충 흔들어서 조종하면서 그것을 스스럼없이 ‘꼭두놀음'(인형극)이라고 하고, 그러다 보니 꼭두놀음은 마치 아무나, 대충 하는 것처럼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 꼭두놀음 바닥이 서둘러야 할 일들

– 뜻 매김과 공유

– 자료를 정리해서 볼 수 있는 얼개 – 도서관이던지 누리집이던지, 데이터베이스던지…

– 꼭두놀음을 제대로 팔아 줄 수 있는, 조금 전문 지식을 가진 공연기획자와 꼭두놀음 공연을 이어주는 얼개

 * 고리낱말 : 인형극, 꼭두극, 어떻게, 하는 법, 만드는 법,

‘한반도 둘레길’을 잇는다는 일을 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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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사대강 아니냐는 비판에, 특히나 못 미더운 도둑정부가 발표를 더욱 못 믿게 만들었던 ‘한반도 둘레길'(이것도 정부 발표 때는 ‘코리아 둘레길’이라고 발표했었다. ‘코리아 트레일’이 안 된 게 다행… ㅡ.ㅡ)
이렇게 큰 일을 한 마디로 얘기하기는 어려운 점이 있지만, 그 ‘한반도 둘레길’ 가운데 아주 큰 축인 동해 쪽 ‘해파랑길’ 구간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써 아마도 해파랑길이 가진 문제를 그대로 가지고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하게 된다.

‘걷나들이길’이란 것이, 이어놓기만 한다고 ‘걷나들이길’인가! 그건 길이 문화에 미치는 영향을 몰라서 하는 얘기이거나 보기 싫은 것일 게다. 물론 걷나들이길을 팔어먹(!-이 땅에 그런 걷나들이길이 한둘인가!)으려면 이야기(이걸 잘난 척 ‘스토리텔링’이라 하더라…)가 담겨 있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보다는 길이 지나는 곳 문화를 어떻게 보여주는가(아마도 가장 중요!?!)와 곁들이 시설도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
가장 쉽고 따지기 쉽게(좀 속물스럽기도 하지만) 얘기해 보자.
우리나라를 걸어 여행하려면 두 사람 기준으로 하루 두 끼만 먹는 쳐도(배 고파! ㅡ.ㅡ) 아무리 적게 쳐도 2만 4천원 정도에, 허름한 모텔에 묵어도 4-5만원 해서 적어도 하루 7만원, 한 달로 치면 210만원(이것 조차도 걷고 먹고 자고만 했을 때 얘기다. 여러 가지를 감안하면 아마도 두 사람 기준 300만원 정도는 들지 않을까? 이걸 또 한 사람으로 셈하면 밥값은 반이 되겠지만 묵는 삯은 별로 줄지 않는다.) 흔히 우스개 삼아 하는 말로, 이 돈이면 동남아 가서 귀족처럼 즐기다 오는 게 낫다.
그나마 제주 올레길이 성공했다고 매김받는 것은 다만 제주 풍경이 아름다워서 뿐만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스페인 산티아고 가는 길이 이름 떨칠 수 있는 것도 그냥 이미 이름 나 있기 때문 만은 아닐 것이다.

특히나 이 글에서는 ‘한반도 둘레길’이 정부가 나서서 한 일이 아니라 민간이 나서서 한 일이라는 데에 점수를 주고 싶은 모양이나, 내가 가 본 어느 걷나들이길도 그 곳에서 뜻 있는 사람들이 손수 걸어보고 만들었다는데, 갓길도 없는 찻길이 길에 들어있는 곳도 있었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여행에서도 ‘안전’이 으뜸 아닌가? 그것도 머리는 돌이요 양심은 사막인 공무원이 만든 길도 아니고 전문 여행자가 꾸몄다는 길이 그 모양이라니!(그 분들은 갓길도 없는, 포장된 길을 몇 킬로미터 씩이나 걷고 싶을까? 지금은 지자체가 나서 길 보수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차라리 여는 때가 좀 늦어지더라도 때를 기다렸어야 하는 것 아닌가? 지금껏 사고 소식이 안 들려 다행이지만 만약 사고가 났다면 누가 책임지려 했을까? 한 사람이라도 책임지려 하는 이나 있었을까?)

이 죄담회에서는, ‘앞으로 이야기[스토리]가 있는 길로 잇고 싶다’고 한 모양이지만, 그 때의 그 ‘이야기’라는 것이 그리 쉽게, 뚝딱 만들어 지는 것인가? 역사를 통해서, 삶을 통해서 생겨나야 하는 것 아닌가?(그렇지 못하다 보니 어거지 이야기를 지어낸다. 사람을 속이는 것이다.)
또 다른 보기로, ‘부산에서 서울을 잇는 옛길을 되살리고 싶다’는 분도 있다. 물론 길을 잇는 것은 어려울 것이 없다. 하지만 그 안에 담겨야 할 ‘이야기’가, 큰 역사 빼고는 거진 없어졌다. 옛스런 길이 다 없어져 찻길이 되어 버렸고 옛 마을이 다 없어져 버렸다.(행정단위로 ‘마을’은 있을지 모르지만 삶의 공동체로서의 ‘마을’은 별로 남아 있지 않다고 본다.) 안전이나 불편이나 돈 이런 걸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며 그냥 ‘옛 사람들도 이 길을 이렇게 걸었겠거니…’하는 위안 만으로 걸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걷는 길이 참말로 옛 사람들이 걷던 그 길 느낌을 얼마나 가지고 있을까…(값어치가 적은 유적, 문화재는 제대로 관리도 않거나 없애고서 ‘무슨무슨 터’하는 푯말 하나로 해치우는 이 나라에서…)

게다가 정부가 발표할 때 유달리 그걸 강조했었는지, 언론마다 ‘한반도 둘레길'(그 때는 정부 발표 대로 ‘코리아 둘레길’이라고 했었다.)이 ‘산티아고 가는 길’보다 무려 3배나 길다는 걸 강조했었다.
무려 5천년 역사를 가졌다고 하는 우리 겨레가, 뻑하면 하는 소리가 고작 ‘숫자놀음’이다. ‘동양에서 가장 큰’, ‘누구보다 몇 배’, ‘세계 최단’… 얼찬 문화를 가지지 못한 이들이 이런 숫자 가지고 헛품을 잡는다.
모든 문화 상품은 역사를 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숫자는 쉽게 흉내 낼 수 있고 따라 잡을 수 있지만, 역사라는 건 함부로 흉내내기도 어렵고 따라 잡을 수 없는 것이다.
아우디가 집채를 짓듯이 수십, 수백년을 두고 만드는 문화 상품 만이 제대로 값매김 받을 수 있고 빛이 날 것이다.

봄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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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비 한번에 스러지는 것은,

꽃잎이나

사랑이나

삶이나…

사진 : 김동원

“꽃잎” – 이정현

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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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부딪힐 만한 일은,

부딪히고 나서 핑계를 댈 것이 아니라

부딪히기 앞서 서로 피해야 하는 것이 옳다.

알간?

(우리처럼)개판 캄보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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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알게 된 건데…
‪#‎앙코르왙 수입은 민간업자가 먹는다네?
그럼, 온 누리 학자들이 발굴하고 복원, 수리해서 민간업자들 배 불리는 건가?

거 참, 개판 ‪#‎캄보디아‬…-.-

#‎앙코르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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