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에 대하여 – 특히 ‘자살’을 생각하는 이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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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은 어떤 모습일까?
이 삶이 끝나고 나면 모든 것이 끝나는 걸까?
만약 지금 삶이 뒤에 있을 삶에 영향을 준다면…?

‘삶’과 ‘죽음’을 두고는 여러가지로 말할 수 있을 것이나 여기서는 좀 단순하게 이 삶과 죽음과 그리고 그 뒤에 있을 그 무엇에 대해 말해보고자 합니다.(종종 질문이 나오니 쭉 달아 읽지 마시고 질문 즈음에서 잠깐 짬을 내서 생각해 보고 정리해 보고 나서 다음을 읽으면 더 좋겠습니다.)

이 삶이 끝나고 나면 모든 것이 끝나는 걸까요?
이것을 살펴보자면 먼저 우리 삶을 좀 살펴봐야 합니다.
우리 삶이란 어떤 모습입니까? 우리는 우리 삶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리의 과거는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기억’이라고 하는 것을 빼고 나면 우리가 과거라는 걸 알 수도 없고 심지어 현재가 있다는 것 조차 알 수가 없습니다.(여기서 부터 ‘무슨 개소리야?’ 하시는 분이라면 다시 한번 찬찬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보기를 들어, 소리는 파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혹 가락[음악]에 조예가 깊거나 아는 분 가운데 그런 분이 있다면 ‘똑 같기만 한 높이의 소리가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 한번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떨림이 없이 똑 같기만 한 소리는 결코 존재할 수 없습니다.(문과 쪽 사고를 하시는 분께는 좀 어렵나요?)
소리는 앞 뒤 높낮이 차이 때문에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떨림 속에서…)
우리 삶에서 ‘현재'(혹은 ‘지금 찰라’)라고 하는 것과 견줄 수 있는 (시간의)기억이 없다면 결코 과거는 물론이거니와 ‘현재’가 있는 것조차도 알 수 없습니다.(‘기억’은 또한 ‘시간’이라는 관념과 함께 합니다.)
어떤 분은 기록(글자나 영상으로)해 두면 되지 않겠는가 하겠지만, 그 기록이 과거의 것이라는 것조차 기억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는 알 수 없습니다.
여튼 이렇게 찰라와 같은 ‘현재’라는 것은 ‘기억’-‘시간’이라는 관념-이라는 것 위에서 여러가지 인식이 나오게 됩니다.
‘지금 찰라’와 다른 ‘과거 찰라’, 1초전, 한 시간 전, 하루 전, 한 해 전,…
이 기억은 우리 ‘기억’ 속에 다 남아있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이 ‘기억’ 덕분에 ‘시간’이라는 개념이 생겨나고 이것은 기절하거나 잠이 들기 전까지는 거의 쭉 이어집니다.
그렇다면 잠이 들면 우리는 존재하지 않습니까?
당연히 아니라고 자신있게 말할 것입니다.(물론 더 깊이 들어가면 이것 또한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는 존재론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므로 여기서는 줄이겠습니다.)

여튼 우리는(사람은) 시각의 이어짐, 찰라의 이어짐을 통해 시간-과거, 현재-을 인식하고, 기억을 통해 우리는 잠들기 전과 깨어난 후의 동일성을 인식합니다. 우리가 과거와 현재라는 이 시간 속에서 존재한다고 ‘가정’한다면 사실 기억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술을 마시고 기억이 끊어진다 해도 어쨋든 (‘내’가 존재한다는 가정 아래서는)술에 취하기 전과 술에 취하고 난 뒤 기억이 끊어진 때와 그리고 나중에 술에서 깨어 힘들어 하는 나 사이에 연속성을 존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그렇게 짐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어제 낮과 어제 밤 꿈과, 혹은 어제 밤에 꾼 꿈이 생각이 안 난다면 꿈은 (기억에서)없는 채로 다시 오늘 낮은 서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더 깊이는 들어가지 않기로 하자고 위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번 삶 뒤에 기억이 끊어진다고 해서 다음 삶이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어제 낮의 기억과 어제 밤의 기억은 끊어져 있지만 오늘 깨어난 뒤에는 어제 낮의 ‘나’와 어제 밤 꿈에서의 ‘나’와 그리고 다시 오늘 ‘나’를 서로 같이 봅니다.(주로 ‘아무개’라는 이름도 연속성을 가지긴 하지만 사실은 이름으로써가 아니라 그냥 ‘나라는 것’으로써 연속성을 가지며 이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혹시 꿈 속에서 ‘사람’이 아닌 다른 존재로서 있어 본 적은 없습니까?
혹 스스로가 그런 꿈을 꾼 기억이 없다면 주위에 물어 보십시오. 가끔 그런 꿈의 기억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저도 그런 꿈을 꾸어 본 적이 있습니다.
꿈 속에서 사람이 아닌 다른 존재로 있다 해도 대개는 잠깐 이상하게 생각할 뿐 더 이상 놀라지는 않습니다. ‘있다는 것’-존재함-에 너무 깊이 사로 잡혀서 무엇으로 있는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습니다.(아마 그것에 크게 신경을 쓴다면 아마 이른바 악몽이 될 것이고 놀라 깨어나 버릴 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제 낮에 ‘사람’으로 있었던 ‘나’는, 어제 밤 꿈에서는 다른 것과 나를 동일시함으로써 그냥 별일 없이 있[존재]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 깨어서는, ‘어제 밤 별난 꿈을 꾸었네’하며 다시 ‘사람’으로 있[존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죽음’은 어떨까요?
삶과 죽음이 몸[육체]이 이어지지 않고 기억이 이어지지 않는다 해서 과연 ‘죽음’은 없는 것일까요?
오늘 깨어난 뒤에서야 ‘어제는 꿈을 꾸었고 아마도 ‘나’는 꿈 밖에서 꿈을 꾸고 있었겠지’라고 짐작해서 말하겠지만, 과연 어제 밤 꿈을 꿀 때 진짜 ‘나’는 어디에 있었을까요? 꿈속에 있는 것이 진짜 ‘나’였을까요? 꿈 밖에서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진짜 ‘나’였을까요? 지금 살고 있는 나, 깨어있는 ‘나라는 것’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서는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어떻게든 이어져 있었으리라 짐작하게 됩니다.
그럼 이 삶과 그 다음의 죽음은 어떨까요? 기억으로 이어져 있지는 않지만 딱 잘라 없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그것이 사실인지 아닐지를 모를 뿐, 있다는 증거는 있을 수 있어도 없다는 증거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없다’는 증거는 실은 ‘모자람’-혹은 ‘빔’-의 증거일 뿐입니다.
쉽게 말해 우리가, ‘우주 공간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할 때는 정말로 완전히 없는 것이 아니라 행성이나 이런 것이 없다-즉 빔, 모자람-는 뜻일 뿐입니다.)

제가 보기에 삶과 죽음의 연속성은 이런 식으로 이어집니다. 가끔 잘못 이해하듯이 몸이나 기억이나 혹은 ‘영’ 또는 ‘혼’이라는 것의 존재로써 이어진다기 보다는(그런 것은 ‘비유’라고 봅니다.) 그냥 ‘동일시‘로 나타난다고 봅니다. ‘동일시’가 있으면 같은 존재로 보게 되고 ‘동일시’가 없으면 다른 존재로 보게 됩니다.
술에 취하기 전에 멀쩡하게 깨어있을 때의 ‘나라는 것’과 동일시 하던 존재가, 술에 취해서는 사회에 불만이 많고 전봇대하고도 싸우며 길 가에서 적당히 바지를 내리고 오줌을 눠도 전혀 부끄럽지 않은 ‘나라는 것’과 동일시하게 되는 것처럼요…
술이 깨고 난 다음에야 그 두 존재가 결국 같은 존재라고 인식하지만 술에 (완전히)취했을 때는 그 둘을 결코 같은 존재로 인식하지 않습니다.(사실 몸으로 이어져 있는 것 말고는 같은 존재라고 말하기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감히 그 무서운 상사에게 덤비는 짓도 하지 않겠지요. ^^;;)
그 두 존재를 결국 같은 존재라고 인정한다면, 살아 있을 때의 존재와 죽은 뒤의 존재 사이에도 어떤 연속성이 존재할 ‘수’도 있다고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정말로 연속성이 있는지는 더 깊은 수준에서 얘기해야 합니다만…)
그리고 꿈이라는 경험과 술에 취하는 경험에서 보듯이 그 상태의 정신 상태는 그 앞 상태에서 영향을 많이 받게 됩니다.
쉽게 말해서 아주 기분이 나쁘거나 무섭거나 한 채로 잠에 들면 꿈자리가 뒤숭숭하거나 무서운 꿈을 꿀 가능성이 큽니다. 마찬가지로 아주 무섭거나 불길한 꿈을 꾸다가 깨어서는 그 날 기분이 좋을 리가 없습니다. 그 반대로 아주 기분 좋은 채로 잠에 들면 꿈도 즐겁거나 편안할 가능성이 크겠고요…
술에 취한 상태 역시도 마찬가지로 술에 취하지 않은 상태에서 뭔가 마음에 쌓인 것이 많다면 술에 취해서 온갖 주사와 행패로 나타날 가능성이 크겠지요.
죽음과 다시 태어남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자살’이라는 것을 무척 좋지 않게 보는 것이, 어쨋든 ‘자살’을 기분 좋게 받아들일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고 아주 심한 절망이나 공포 속에서 죽게 될 것입니다. ‘삶’과 ‘죽음’과 ‘다시 태어남’이 어떻게든 이어져 있다면, 자살에서 느끼는 좋지 않은 상태가 그 뒤 ‘죽음’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고 그것은 다시 ‘다시 태어남’에도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물론 전쟁 같은 타의에 의한 죽음 역시도 비슷할 테고요…)

꿈 속에서 가위에 눌리거나 무서운 꿈을 꾸고 싶지 않다면 적어도 깨어있을 때의 삶을 ‘스스로’ 우울하게 만들지 마십시오. 그리고 그것은 다음 날 깨어난 뒤의 기분까지 좋지 않게 만들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죽음 뒤의 삶을 고통 속에서 살고 그러고도 다시 그 뒤의 삶까지 힘들게 살고 싶지 않다면 지금 삶을 ‘스스로’ 괴롭게 만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제가 드리고 싶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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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소리값을 돋게 내는 것을 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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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가락’, ‘소리가락‘-한자말로는 ‘억양’ 혹은 흔히 말하는 중국말에서 ‘성조’- 얘기를 하다 보니 떠 올라서 하나 더…

한족말[지나말;중국말]에서 ‘소리가락’은 글자 하나에서 이루어지는 데에 견줘 우리말에서 (말)가락은 낱말에 걸쳐서 나타납니다.
보기를 들어 ‘가지’라고 했을 때, 약간 높게 소리내면 나무의 겉 줄기를 말하는 것이고, 낮다가 높여 말하면 풀 한 갈래를 말하는 것이 되겠습니다.
이런 말을 ‘글자와 소리가 같은, 뜻 다른 말'[동형동음이의어]라고 하지요.(하지만 결코 소리가 같지 않습니다!)
그와는 좀 다르게 ‘글자는 다르고 소리가 같은, 뜻 다른 말'[이형동음이의어]도 있는데, 이런 보기는 ‘너머’와 ‘넘어’ 같은 말을 들고 있습니다.(이것도 결코 소리가 같지 않습니다! 흔히 같다고 가르치는 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너머’는 소리 그대로 ‘너머’가 맞지만, ‘넘어’는 얼핏 ‘너머’와 비슷하게 소리나지만 입술이 좀 더 서둘러 닫힌다는 점에서 서로 다릅니다.
우리가 ‘의’를 소리낼 때 어떤 이는 ‘으’나 ‘이’라고 소리낸다고 해서 ‘의’를 없애고 ‘으’나 ‘이’로 모을 수 없는 것과 같고, 사람들이 ‘애’와 ‘에’를 잘 나눠 쓰지 못한다 해서 하나로 합쳐 버릴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사람들이 가끔 잘못 써서 그렇지 엄연히 ‘ㅐ’ 소리값과 ‘ㅔ’ 소리값은 다릅니다. 물론 이것도 제대로 안 가르치지요… ‘f’하고 ‘p’는 틀리면 그렇게 뭐라 하면서…)
다른 보기로, 흔히 ‘닭’을 홀로 쓸 때는 ‘닥’이라 소리낸다고 하지만, 이 또한 틀린 말입니다.
비록 비슷하게 들릴 지라도 ‘닭’에는 분명 ㄹ(리을) 소리값이 살아 있습니다.(그리고 경상도 쪽에서는 리을과 기윽을 모두 소리 냅니다.)
그래야만, ‘홀로 쓸 때는 ‘닥’이라 소리내고 뒤에 ‘-이’가 붙으면 ‘달기’, 뒤에 ‘-만’이 붙으면 ‘당만’이 된다’고 하는 어거지 규칙을 외워 쓰는 것이 아니라, 뒤에 무엇이 붙던지 간에 규칙에 맞게 그냥 저절로 소리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보기로 밥을 준비하는 곳을 이르는 말이 ‘부엌’인지 ‘부억’인지는 뒤에 홀소리 말을 붙여보면 절로 또렷해 집니다.(보기를 들어 홀소리인 ‘-이’를 붙여 ‘부어키’로 소리나면 ‘부엌’이 되고, ”부어기’로 소리나면 ‘부억’이 옳을 것이 절로 또렷해 집니다. 찾아보니 엉터리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부엌’을 ‘부억’이라 소리낸다고 해 놨는데, 정녕 우리가 기윽과 키읔조차 제대로 소리내지 못한단 말입니까? 받침 키읔은 받침 기윽보다도 혀 뿌리 쪽에 훨씬 더 힘을 주어 막는 소리입니다.)
쉽게 말해 이렇게 되면 굳이 규칙을 외우고 자시고 할 까닭이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사람들이 흔히 맞춤법이 틀리는 것도 말을 제대로 소리낼 줄 모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ㅐ’와 ‘ㅔ’를 나눠 말할 줄 모르기 때문에 늘상 헛갈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비슷한 보기로 ‘뱃놀이’가 흔히 ‘밴노리’처럼 소리나지만 절로 ‘밴노리’하고 비슷하게 소리나는 것은 자연스러우나, 그렇다고 ‘밴노리’로 소리내라고 가르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이것을 두고는 나중에 한족말 소리값을 가지고 다시 한번 보기를 들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말을 제대로 하는 것은 ‘규칙’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말’을 바로 깨쳐야 하는 것이고 그러면 저절로 바로 쓸 수도 있습니다.
글자는 그릇이요 말은 알맹이입니다.

우리말[한말] 한마당/ 우리말글[한말글] 모둠 – 우리말, 한말, 사투리, 글쓰기, 번역, 통역, 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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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에서 가락[억양,성조]은 더없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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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다시피 ‘산낙지’라는 것이 있습니다.
저는 어릴 때 그것이 무얼까 무척 궁금했습니다. ‘산에서 무슨 낙지가 나는 걸까…?'(‘산[뫼]거머리’가 있단 소리는 들어서 혹시 그런 것과 비슷한 걸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여러분은 ‘산낙지’를 어떻게 소리 냅니까?
흔히 사람들은 ‘산-‘을 높게 소리냅니다. 그러면 그건 ‘뫼’라는 뜻이 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살아있는 낙지’를 말하려면 ‘산-‘을 바닥을 긁듯 낮춰 소리내야 합니다.
흔히 살아있지만 송장이나 마찬가지인 사람을 일컬어 ‘산송장’이라 하는데 이 때 ‘산-‘은 낮춰 소리냅니다.
그에 견줘 ‘산마루’할 때 ‘산-‘은 약간 높게 소리냅니다.
다른 보기로, ‘장사’를 첫 낱내(소리마디)에서 높게, 둘째 낱내에서 약간 낮춰 소리내면 물건을 사고 파는 것을 말하고, 첫 낱내에서 낮다가 둘째 낱내에서 약간 올려 소리내면 힘이 센 사람을 말하며, 첫 낱내에서 더 낮게 바닥을 긁듯 소리내다가 둘째 낱내에서 약간 올려 소리내면 ‘주검을 파묻는다’는 뜻인 한자말이 됩니다.

이렇듯 우리 말에서 ‘소리가락‘[억양]은 무척 중요합니다.
지나[중국] 한족말을 배우다 보면 ‘성조’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이 말하자면 낱말 하나에 걸맞은 ‘소리가락'[억양]이 아닐까 싶습니다.(그러므로 ‘성조’를 우리말로는 ‘소리가락’ 혹은 낱말 하나에 걸맞은 가락이니 ‘낱말가락’ 같이 써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우리말에서 이처럼 중요한 소리가락[억양]을 왜 가르치지 않는 걸까요?
하다못해 나라말글[국어] 가르침이[교사]들 조차도 규칙만 달달 외웠지 우리말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제대로 쓰지 못하는 이가 많습니다.

말 가락에 따라 말 뜻이 달라지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말 가락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 것은, 우리말을 죽이겠다는 뜻 밖에는 안 됩니다.
딴겨레말 떠받들고 우리말 죽이는 국립국어원
우리말[한말] 한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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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덧붙임 1.
얼숲에서 얼숲에서 조민호 님께서 ‘세발낙지’가 발이 세 개인 낙지인 줄 알았다는 댓글을 달아주셨습니다. – 댓글 보기 (아시겠지만, ‘세발낙지’는 ‘가는 발 낙지’라는 뜻입니다. 가늘다는 뜻으로 ‘細’를 말할 때는 약간 높여서 소리내야 합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흔히 말하는 ‘대게’도 흔히 말하듯이 낮춰 소리내면 ‘큰 게’라는 뜻이 되고, ‘대나무 게’라는 뜻으로 말하려면 ‘그보다는 약간 높여서 소리내야 합니다.

* 덧붙임 2.
한족말에서 ‘성조’라고 하는 것이 쉽게 말하자면 ‘낱말억양’인데 북한에서는 이걸 ‘소리가락’이라 한다고 해 놨네요. ‘억양’이란 한자말도 (말)’가락’으로 갈음할 수 있겠습니다.

* 덧붙임 3.
다른 보기를 몇 가지 더 들어보겠습니다.
물건을 사고 파는 일을 뜻하는 ‘장사’와 힘이 센 사람을 이르는 ‘장사’와 주검을 묻는 것을 뜻하는 한자말 ‘장사’를 어떻게 구분해서 소리내는지요?
흔히 뜻을 전하려 입으로 내는 소리를 뜻하는 ‘말’과 짐승 한 갈래인 ‘말’
우리는 이것을 단지 낱말 길이로만 배우지만 가락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또, 과일 가운데 하나인 ‘배’와 물 위에 띄워 타는 ‘배’와 사람 장기인 ‘배’와 곱절을 뜻하는 한자말 ‘배’와 잔을 뜻하는 한자말 ‘배’와 절을 뜻하는 한자말 ‘배’와 태, 씨눈을 뜻하는 한자말 ‘배’도 있습니다.
또 장기를 일컫는 ‘눈’과 물기가 얼어 얼음기로 내리는 ‘눈’도 다만 소리 길이로만 배웠지만 사실은 가락으로 더욱 또렷해 지는 말입니다.(약간 높게 소리내면 장기, 위에서 아래로 내렸다가 다시 살짝 올리면 하늘에서 내리는 눈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내렸다 올리는 시간 틈 때문에 이걸 긴 소리값으로 친 것 같습니다.)

* 덧붙임 4.
글로 적을 때는 여러가지 기호나 약속을 함께 적을 수 있지만 말에서는 그런 것이 어려운 대신에 서로 구분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수를 쓰게 됩니다.
쉬고 맺고 끊는 것도 그렇고 한족말에서 성조(소리가락) 같은 것도 그렇고 소리의 길고 짧음도 그렇습니다.
우리말 가운데 아직도 여러 고장에서는 소리가락(흔히 ‘억양’이라 하고 ‘성조’하고도 비슷)이 있는데 이것도 그 가운데 하나라고 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로지 길고 짧음만 배웠습니다.
심지어 쉬고 맺고 끊는 것조차 어거지 규칙으로 쉼표라는 것으로만 배운 느낌입니다.(요즘은 나아졌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요즘도 바르게 말하기를 가르치는 것 같지는 않으니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쉼표를 찍고 안 찍고하고 얽힘 없이 쉬고 맺고 끊는 걸 잘 해야 말 뜻이 또렷해 집니다.)
그래서 흔히 ‘같은 소리 다른 뜻말'[동음이의어]은 사실 같은 소리가 아니라 그저 비슷한 소리일 뿐인데도 같은 소리말이라 엉터리로 가르치고 있다는 것입니다.(그 가운데 아주 가끔 참말로 모든 소리값이 같은 낱말들이 있긴 합니다.)
물론 서울 쪽 분들은 이 소리가락이나 이런 것에서 좀 약한 것 같기는 합니다만, 앞서 썼던 것처럼 다른 고장에서는 글자는 같지만 가락이나 그런 것으로 구분해서 쓰는 말-‘장사’ 같은-도 있고 말 자체가 또렷히 구분되는 말-‘닥’이 아닌 ‘닭’-도 있지 않나 하는 것입니다.

* 덧붙임 5.
경상도 말에 남아있는 소리가락[억양]을 한번 즐겨 보시길… – 경상도 사투리 해독법

법칙을 죽여야 우리말이 살 수 있습니다.

댓글 2개

‘맑다’를 ‘말ㄱ따’로 소리내고 ‘깨끗이’가 아니라 ‘깨끗히’라 쓰는 것이 옳다는 글을 쓰고 보니, 좀 더 덧붙여야 할 것 같아 다시 덧보탭니다.(그 글 보기)
(그 밖에 자잘한 제 생각은 알리는 말씀깨몽 생각을 봐 주십시오.)

저는 ‘표준말’ 규칙이 없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말글이란 것은 살아있는 것이고 뭇사람들이 쓰고 학자들이 연구하면서 다듬어져야 하는 것이지 마치 왕이 명령하듯이 규칙을 정할 것은 아니라 봅니다.(이미 있는 말글 속 규칙은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학자들이 ‘가지런히’ 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이건 실랑이거리가 될 만한 일인데 한마디로 얘기하기는 어렵습니다. 혹 제 주장이 괴이적다는 분은 거리낌없이 말씀해 주시면 더불어 얘기 나누겠습니다.

한글은 우리말을 잘 드러낼 수 있는 옷과 같은 것입니다.(옷이 아무리 아름다운들 그 사람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나라는 몸은 얕잡아 보고 옷만 칭찬하네요.^^;)
세종큰임금 때 훈민정음(한글과 같지 않습니다!)을 만들 때 한글이 가진 온갖 성질을 다 담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겹홑자[겹자음]도 있고 지금 우리가 못 보는 여러가지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제를 거치고 그 뒤를 이어 딴겨레말 떠받들고 우리말 죽이는 국립국어원을 거치면서 우리말한글이 가진 좋은 점은 다 죽여놓고 껍데기만 떠받들고 있습니다.(사실은 떠받드는 시늉만… ㅡ.ㅡ)
몇 가지 보기만 든다면, 훈민정음에는 ‘사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말에는 높낮이 가락에 따라 한글로는 같은 낱말이 서로 다른 뜻을 가집니다. 그리고 겹홑자를 두어 여러가지로 썼습니다. 소리값을 나타내기도 했고 다른 뜻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 모두를 다 살리자는 것은 아닙니다. ‘쉽게 한다’는 구실을 대어서 없앴지만 말글살이에서까지 쓸 까닭은 없습니다. 다만 우리말과 한글을 풀 때 쓸 수 있도록(마치 기호처럼) 해 두면 우리말이 크게 살아날 텐데 그걸 아예 없애버렸습니다.
하다못해 물 위에서 타는 ‘배’과 열매 ‘배’조차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일도 생기고 있습니다. 뿌리푸성귀인 ‘무우’도 ‘무우’에서 ‘무-‘(긴소리값)에서 아예 ‘무’로 절름발이로 만들어 버렸습니다.(이 규칙이 어렵기라도 합니까?)
또다른 보기로, 제가 얘기했듯이 ‘맑다’를 ‘말ㄱ따’로 소리내면 1. 말뿌리가 살아 있게 되고(말따-말근으로 바뀌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2. 우리말에 따른 한글에 소리내는 원리가 그대로 담겨있고(‘막따’는 말이 바뀜에 따라 원리에서 벗어나지만 ‘말ㄱ따’는 원리를 그대로 가짐) 3. 그래서 한글 장점까지 그대로 살릴 수 있습니다.(우리말 값을 적는 데에 가장 알맞은 한글 틀)

마지막으로 이런 것들이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다만 낯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라도 왕이 내린 명령 같은 법칙을 없애고 학자들이 마음껏 연구할 수 있도록 하고 배울 때는 그런 것이 있다는 것 정도만 가르쳐야 합니다.(견주자면, ‘진화론’을 흔들리지 않는 진리로 알고 있는 이들도 많은 것과 같습니다.)

* 혹 제가 얘기한 것 가운데서는 어떤 말씀이라도, 어떤 물음이라도 거리낌없이 말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우리말[한말] 한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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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자녀에게 손전화를 사줄 때 해야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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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신 손전화를 가지게 되어 기쁘지? 그런데 이것을 사용하는데 몇 가지 규칙이 있단다.
이 규칙을 잘 지킨다면 훌륭한 어른으로 커갈 수 있을 것이다. 꼭 아래 사항을 새기기 바란다.

1. 손전화는 너에게 빌려주는 것이다. 엄마 돈으로 샀고 삯[요금]도 내주니까… 원래 엄마 것이다.

2. 손전화 열쇠[암호]는 늘 엄마가 알아야 한다.

3. 전화가 오면 “여보세요. 저는 누구입니다”라고 받고, 전화 예절을 잘 지켜라.
“엄마” 혹은 “아빠”에게서 전화가 오면 꼭 받아야 한다.

4. 엄마가 허락하는 때에만 전화를 쓸 수 있다.
특히, 놀이[게임]나 쪽지[메시지] 보내기 같은 것은 손수 시간을 정해서 써라.

5. 학교에 갈 때는 손전화를 가지고 가지 않는다. 마실 갈 때, 엄마가 가지고 가라고 할 때만 가져갈 수 있다.

6. 전화기가 뒷간에 빠지거나, 부서지거나 잃어 버리면 고치는 삯이나 바꾸는 값은 네가 져야한다.
용돈을 모아서 갚아야 한다. (그런 일은 꼭 생길 수 있으니 용돈을 잘 모아 두어야 한다.)

7. 손전화로 거짓말을 하거나 누구를 놀리거나 속이는데 쓰면 안된다.
특히 다른 사람 마음을 아프게 하는 대화에 끼어서도 안된다.
먼저 좋은 친구가 되어 주고 남들 싸우는데 끼어들지 않도록 해라.

8. 얼굴을 마주하고 할 수 없는 말을 손전화 글자로 보내면 안된다.

9. 어떤 친구에게 글자를 보낼 때, 그 친구 부모님이나 학교 선생님이 옆에 있다고 생각하고 보내라.

10. 정보 찾기는 꼭 백과 사전 누리집을 써라. 쌍소리나 동영상, 나쁜 사진은 찾아보면 안된다.

11. 열린 데[공공 장소]서는 손전화를 끄거나 떨림으로 해두어야 한다. 식당, 영화관, 교회 같은 데.

12. 낱삶[개인 사생활]에 얽힌 사진을 찍거나 보내지 마라. (엄마, 아빠, 집안, 자기 사진 같은)
그런 사진이 다른 사람 손에 들어가면 매우 좋지 않은 일이 생길 수 있다. 세상에는 나쁜 사람도 많다.

13. 사진이나 동영상을 너무 많이 찍지 마라. 꼭 필요하다는 것만 찍어서 담[보관]아둬라.

14. 가끔은 손전화를 쓰지 않도록 스스로 결심하고 책을 읽거나 다른 일을 하는데 보내거라.

15. 맨날 친구들이 듣는 음악보다는 클래식 음악 같은 것도 들어서 문화에 얽힌[문화적] 눈길[시야]도 넓히거라.

16. 맨날 같은 놀이만 하지말고, 이따금 머리에 좋은 낱말 맞추기, 그림맞추기[퍼즐]놀이, 두뇌 놀이를 하는게 좋다.

17. 버스에서도 손전화만 들여다 보지 말고 창밖 세상도 보고 새로운 사람들도 구경하고 해라.
궁금한 게 있으면 찾기[검색]만 하지말고 자기 스스로 생각도 해 보고…

18. 이 규칙들을 잘 지키지 않으면 손전화를 잠시 빼앗을 수 있다.

여기에 적은 것은 손전화를 쓰는 데 뿐만 아니라 앞으로 살아가는 삶[인생]에서도 중요한 것들이니 꼭 지키도록 노력해 보기 바란다. 엄마 아빠는 너를 믿는다.

— 지난 성탄절에 미국의 한 어머니가 “아들에게 아이폰을 사주면서 내놓은 18가지 규칙”이라는 글을 누리방[블로그]에 올려 화제가 됐습니다. 이를 우리 실정에 맞게 옮긴 글을 퍼왔습니다.
아이들에게는 꽤 엄격한 규칙이지만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목이 많네요.

본디글과 옮긴 글 고리 : http://blog.daum.net/themeads/8438759

우리 말과 한글날 – 우리말이 살아야 한글이 살아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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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말과 한글날 – 우리말이 살아야 한글이 살아납니다.>

어김없이 한글날이 돌아오고, 그 동안 온갖 들온말[외래어]을 써 대던 언론들도 앞다투어 뭇사람들 말글살이를 꾸짖습니다.
그리고 방금, 인도네시아 찌아찌아겨레에게 한글을 가르쳐주던 세종학당이 모두 물러나왔다는 소식을 봤습니다.
‘한글’ 얘기만 나오면, 과학에 맞느니 우수하느니 하는 한글인데 왜 밖에서는 그리 인정받지 못 할까요?
그리고 한글이 우수한 것은 왜 거진 딴나라 학자들 말을 근거로 드는 걸까요? 우리는 딴나라 학자들만큼 우리 글자인 한글을 모르는 걸까요?
프랑스가 제 나라 말글을 지키고 빛내려 얼마나 힘을 쓰는지, 영국이 영어를 널리 퍼뜨리고 빛을 내려고 얼마나 힘을 쓰는지는 우리는 모르는 걸까요?
우리가 한글날을 쉬는 날로 만들어서 기리고, 한글이 아무리 우수하다고 말로만 떠든 들 그것을 밝혀내지 못하고 그것은 이루어내지 못하면 공염불에 지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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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철수 목판그림, 백성의 소리, 하늘의 소리, 1992, http://www.mokpan.com

우리가 이토록 한글을 칭찬하면서도 우리 말글이, 아니 한글 만이라도 빛을 보지 못하는 것에는 몇 가지 큰 흠이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 스스로가 우리말글을 어렵게 쓰고 있습니다.
아는 사람 앞에서 편하게 얘기하던 사람도, 남 앞에 세우거나 글을 쓰게 하면 온갖 어려운 말투와 배배 꼬인 말투를 마구 씁니다.
게다가 행정에 쓰이는 말투나 법률 말투는 또 얼마나 어렵던지요.
어려운 낱말과 말투 때문에 겪는 어려움을 없애려는 ‘쉬운 영어 쓰기 운동'(Plain English Campaign)처럼, 우리도 쉬운 한말글 쓰기 운동을 통해 말글이 어려워서 곤란을 겪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는, 우리말글 잣대가 너무 어렵고, 뭇사람들 말글살이를 옭아매고 있습니다.
아무리 온갖 짐승 가운데 왕이라 한듯, 철창 안에 갇히고 쇠사슬에 묶인 호랑이를 누구 두려워 하겠습니까!
그런데 바로 우리말글이 온갖 잣대에 묶여 있으니 이것을 풀고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우리 말과 글을 늘상 쓰는 우리에게조차 우리말글 잣대가 어렵게 느껴진다면 이게 제대로 된 일일까요?
말글 잣대가 쉬워야 우리는 물론이고 다른나라 사람도 쉬이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로는, 우리말글 교육에서도, 다만 시험을 보기 위한, 이론에 치우친 나라말 공부만 시키고 있습니다.
넷째로는, 우리말글(한말글)이 가진 좋은 점을 조금도 살리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일제가 우리 말글을 없애려고 망쳐놓은 한글과 우리말 잣대를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일제가 우리 말글을 없애려 망쳐놓은 한글로는 지금 우리가 쓰는 말소리조차 제대로 다 적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럴 듯한 우리말사전, 말뿌리사전, 사투리사전도 제대로 없습니다.
우리 글자 표준도 제대로 만들지 못해, 세벌식 글쇠를 버리고 두벌식을 아직 쓰고 있으며, 첨단기기에서 한글 표준화 작업은 그나마 중국에 첫손[선수]을 뺏길 판입니다.
우리 문학작품을 바깥에 알릴 변변한 기구 하나 없고, 딴겨레말을 우리말로 제대로 옮겨줄 기구 하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세종큰임금께서 훈민정음을 만든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여러가지 뜻이 있을 수 있겠지만, 백성들이 편한 말글살이를 하고 글을 몰라 억울한 일을 겪지 않게 하려는 뜻이 크다 봅니다.
그런데, 훈민정음이 만들어진 지 오백육십해가 훨씬 지났지만, 한글은 오히려 훈민정음 때보다 더 꺾이고 우리말은 여전히 서로 뜻이 통하기 어렵고 온갖 들온말로 어지럽습니다.
옛날 뭇백성들이 관청 문서를 알아보기 어려웠던 것처럼 지금도 행정 말투는 여전히 우리가 흔히 쓰는 말투하고 다르고, 법률 말투는 일제 때 말투를 이어오고 있습니다.(꽤 여러 차례 바뀐다고 바뀌었는데도…)
그리고 우리 말과 우리 글자를 빛내려는 이들이 가끔 있기는 하지만, 나라말글에서는 우리 말과 글자가 가진 장점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글자가 말을 제대로 드러내 보여주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처음 훈민정음을 만들 때 세종큰임금과 그 학자들이 겪던 턱[반대]을 지금도 고스란히 겪고 있습니다. 무려 5백년이 훨씬 지났는데도…

한글날만 되면 다들 한글을 칭찬하는 데도, 한글이 우수하다면서 그렇게 칭찬하는 데도 이처럼 옛 것에서 조금도 나아지지 못한 것은 바로 글자의 뿌리, 바탕이 되는 ‘말’을 바로 세우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말은 그 겨레가 가진 얼을 비추는 거울이자, 그 사회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또 ‘글자’가 줄기라면 ‘말’은 뿌리입니다.(그런 뜻에서, 한글날을, 우리말과 한글을 함께 기리는 한말글날로 할 것을 제안해 봅니다.)
권위스런 말투를 쓰는 사회는 권위에 찌들어 있다는 것이고, 험한 말투를 쓰는 사회는 그 만큼 사람들이 살기가 팍팍하다는 뜻일 것입니다.
이 사람이 쓰는 말투와 저 사람이 쓰는 말투가 다르다는 것은 서로 다른 생각을 한다는 뜻일 테고(말투가 그렇다는 것이지 사투리를 말함이 아닙니다.), 편하게 말할 때 말투와 글을 쓰거나 남 앞에서 말할 때 말투가 다르다는 것은 마음가짐에 겉치레가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한글날이 되어 세종큰임금의 뜻을 기리고 한글을 칭찬하는 것은 좋지만, 그 한글이 가진 장점을 우리 스스로 키우지 못하고, 또 그 뿌리, 바탕이 되는 말을 바로 세우지 않는다면 언제까지나 입으로만 하는 공염불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제는 바야흐로, 한글이 가진 장점을 키우고 또 나아가 말을 바로 세움으로써 뭇사람들 말글살이를 편하게 하고, 말을 통해 사회도 바꾸고, 나아가 우리 말글이 이 땅 안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도록 애써야 할 때라고 봅니다.

* 편집자 분께 드리는 말씀 : 이 글 가운데 좀 낯설 수도 있는 낱말이나 말투도 있습니다만, 그런 낱말에는 꺽쇠를 쳐서 풀어놓았으니 뜻을 헤아리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아울러 맞춤법에 맞지 않는 말도 있을 수 있으나 주로 일부러 그렇게 쓴 것이니 함부로 고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 덧붙임. 이 글은, 한글날을 맞아 안철수 선본 아래 ‘정책 네트워크 “내일”‘쪽에 보낸 글을 옮겨 실었습니다.

표준국어대사전 풀이에 들어있는 덫[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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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터리 표준국어대사전을 보다 보면 곳곳에 덫이 있습니다.
오늘은 그 가운데 하나인, 엉터리 표준국어대사전에 자주 보이는 ‘속되다’란 말을 두고…

엉터리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속되다’를 ‘고상하지 못하고 천하다’와 ‘평범하고 세속적이다’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해 놓았습니다.
우리가 쓸 때는 첫번째 뜻보다 두번째 뜻으로 더 자주 쓰는 것 같습니다.(보기를 들어 ‘속된 말로’라고 하면 ‘흔히 하는 말로’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비슷한 뜻말로는 ‘비속하다’, ‘상스럽다’, ‘쌍스럽다’, ‘야비하다’, ‘저속하다’, ‘천하다’ 처럼 하나같이 첫번째 뜻에서 비슷한 말만 찾아 놨습니다.
쉽게 말해서 엉터리 표준국어대사전을 만든 이들과 딴겨레말 떠받들고 우리말 죽이는 국립국어원은 ‘속되다’를 두번째 뜻보다는 첫번째 뜻을 더 크게 본다는 뜻일 겁니다.

이제 그럼, 엉터리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속되다’라고 쓴 것을 보면, 보기를 들어 ‘짝퉁’은 ‘가짜’를 흔히 이르는 입말에서 시작했습니다. 이것을 엉터리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가짜나 모조품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라 풀어놨는데, 표준국어대사전 뜻풀이에 다르면 이는 ‘가짜나 모조품을 흔히 이르는 말’이란 뜻이라기 보다는 ‘가짜나 모조품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란 뜻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즉, 입말에서 시작된 우리말 ‘짝퉁’은 낮잡아 쓰는 말이 되는 것이지요.(하지만 정말로 ‘낮잡아’ 쓴다고 보는 글에는 ‘비속하다’란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엉터리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속되다’고 하는 것은 ‘낮잡다’란 뜻보다는 ‘흔하다’란 뜻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리고 엉터리 표준국어대사전 안에서 우리가 흔히 입말로 쓰는 말들에는 거진 ‘비속하게 이르는’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흔하고 편하게 쓰다보니 낮잡는 뜻으로 더 많이 쓰기도 하지만-누가 다른 이를 깔보고 욕하면서 알아듣지도 못할 한자말을 쓰겠습니까!-, 다른 말로 하면, 우리말로 쓰면 낮잡는 뜻이 되고 한자말을 쓰면 고상한 말이 된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이를 두고는 ‘말에 깃든, 큰나라 떠받드는 생각[사대주의]‘를 봐 주시기 바랍니다.)

엉터리 표준국어대사전을 보다보면 이런 덫들이 자주 있습니다.
앞으로 보이는 대로 가지런히 해서 한번 내놓아 볼까 합니다.

우리말, 한말 한마당/ 우리말 살려 쓰기/ 쉬운 한말글 쓰기/ 우리말과 우리글을 기리는 ‘한말글날’로 하기/ 그리고 딴 겨레말 떠받들고 사대주의 퍼뜨리는 국립국어원

덧. 한자말 ‘함정’을 갈음하는 우리말로는 덫,허방다리,허방,구덩이,구렁텅이 같은 말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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