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를 떠받드는 한국학 학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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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 UCLA’에서 한국학을 연구한다는 이가, 한자를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글을 쓴 것이 있어 여기 옮겨와 대꾸를 해 볼까 합니다.

한문 버린 대한민국, 천 년의 유산을 잃다

이 글을 두고 얼숲에 단 댓글을 그대로 옮겨옵니다. – 얼숲에 있는 그 글 보기

정말 하고픈 말은, ‘한자를 버리지 말자’는 얘기이고 그걸 겉치레를 번지르르하게 말해서 ‘셋을 아울러 동학(東學)으로 크게 회통할 일’이라는 것이네요.
베트남 말은 저는 모르거니와 우리말도 한글도 중국 한자에서 비롯된 바가 아니므로 처음부터 논리 뿌리가 잘못되었다 봅니다.
그게 또렷이 드러나는 데가 바로, ‘해방 후 남과 북은 경쟁적으로 한글 전용으로 내달렸다’는 데인데, 한글만 쓰기[한글 전용]에서 탈이라고 할 것은 바로 한자말을 쓰면서 한자는 쓰지 않고 한글만 쓰는 것에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한자를 떠받드는 이들이 한글을 물고 늘어지는 구실이 되고 있지요.
이 글을 쓴 이도, 우리가 한자말을 쓰면서 한자를 버릴 수는 없다는 것을 외치고 싶은 모양이지만, 아시다시피 그리고 위에서 얘기했다시피 우리말이나 한글은 본디 한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한자말도 굳이 어려운 한자말만 쓰려 하지 않는다면 굳이 한자를 써야 할 까닭도 별로 없습니다.(‘학교’를 ‘學校’로 쓰지 않아 학교에 가지 못한 사람이 있던지요?)
아울러 글쓴 이가, 북한이 한글만 쓰기로 한 것을 두고 ”주체’의 커다란 역설’이라 한 것을 보면, 글쓴이도 한자가 한글의 주체라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 리고 덧붙여, ‘정작 북조선은 민족성이 담겨 있는 우리 고전에 대한 이해가 턱없이 부족’하다고 하면서 한자를 쓰지 않는 것이 우리 고전을 받아들이는 힘이 떨어지는 것에 갖다 붙이고 있습니다.(참,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ㅡ.ㅡ 마치 ‘하느님 믿지 않는 나라는 다 후진국’이라거나 일본이 쓰나미 피해를 입은 것은 하느님을 믿지 않아서라는 헛소리가 떠오릅니다.)
그 러면서 글쓴이가 가진 생각의 또다른 귀퉁이를 드러내는데, ‘훈민정음’을 제멋대로 풀이하면서, 어리석은 백성을 깨우치고 중국 한자의 소리를 제대로 적는 것이 훈민정음의 올바른 구실이라고 은근히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훈민정음’을 두고는 여러가지 풀이가 있거니와 글쓴이가 말한 풀이는 한자를 떠받드는 이들끼리나 하는 풀이일 뿐입니다. ‘훈민정음’을 두고는 ‘김승권‘ 님이 쓰고 있는 “훈민정음 스물여덟자의 원리”가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제가 본 이들이 다 그렇듯이, 한자를 떠받드는 이들은 그들이 스스로 떠받드는 이론이 마치 하나 뿐인 진리인 양 얘기하는 것을 많이 봅니다.
이는 학문하는 자세도 아니거니와 그렇게 막무가내로 주장해서는 서로 얘기를 할 수는 더더욱 없습니다.

그 뒤로도 여러가지 얘기들을 줏어 섬기지만 다 제 잘났다는 걸 얘기할 뿐이고 알맹이는 없습니다.
그러면서 맨 마지막은 참으로 통 큰 듯이 ‘셋을 아울러 동학(東學)으로 크게 회통할 일’이라 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은, ‘한자를 되살리자’이면서…

그리고 재밌는 것이 있어 한 가지만 더 덧붙이고자 합니다.
천자문이 ‘하늘 천, 땅 지, 집 우, 집 주’부터 배운다면서 한자는 천지와 우주부터 배운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 한자를 쓰는 중국이 일반 민중을 핍박한 역사는 어쩌고요… 그 역설을 어떻게 설명하실 건지… ㅡ.ㅡ

말글에서 격(格) 따지는 엉터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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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또,… 또 그 못된 버릇 나온다.

우리 한글은 모자람이 많아 한자를 써야 하고, 중국 한자는 써야 하나 일본 한자는 가려내야 한다.
대체 그게 말이야, 방귀야? ㅡ.ㅡ
누가 좋아하는 것처럼, 한자에도 ‘격'(格)이 있는 거야?
중국 한자는 양반인 거고, 일본 한자는 상놈인 거야?

사실은 그게 아니라, 한자를 써야 한다고 해 놓고 입막음을 하려고 사탕을 하나 물려준다는 것이 일본한자를 물려준 거겠지?
한자 쓰자면서 한자는 격이 높지만, 일본 한자나 영어(영어 갈래 말글을 말하는 거겠지?)는 격이 낮아 몰아내야 한다는 엉터리들.
‘곡학아세’, ‘아전인수’, ‘견강부회’가 무슨 뜻인지는 한자 안 써 줘도 알겠지?

에라이~ 양심에 털난 자들아!

우리가 가진 훌륭한 밑천 – 우리말과 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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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에게 종잣돈이 넉넉한데 비싼 남의 돈 빌어다 쓰겠는가?
우리에게 좋은 재주꾼이 있는데 근본도 모르는 남을 불러다 쓰겠는가?

그런데 왜 우리에게 뜻을 나타내 쓰기 좋은 우리말이 있고 그것을 빛내주는 한글이 있는데, 한자말, 서양말을 더 좋아하는가!
설경구 씨 말대로 ‘비겁한 핑계[변명]’는 하지 마시라!
그대가 얼이 빠졌거나(배울 만큼 배운 자) 아무리 좋게 봐 줘도 별 생각이 없음(많은 뭇사람들)이다!

우리말[한말] 한마당

한자는 뜻이 또렷하다는 엉터리 주장을 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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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가 뜻이 또렷하다’고 말하는 (내가 보기엔 아주 멍청한!)사람이 있다.
‪#한자‬는 뜻이 정해져 있어-쉬이 바뀌지 않아- 좋은 점이 있지만 그것 가지고 뜻이 또렷하다고 할 수는 없다.
중국사람에게는 한자가 뜻이 더 또렷할 테고, 영어를 쓰는 사람에게는 영어 글자가 더 뜻이 또렷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게다가 한자 뜻이 또렷한 것은 한자를 아는 사람에게나 걸맞는 얘기이고, 한자라고 해서 다 뜻이 또렷한 것도 아니다.
‘백미'(白眉)는 그에 얽힌 얘기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냥 ‘흰 눈썹’일 뿐이다.
‘백미'(白眉)와 ‘흰 눈썹’에서 대체 무엇을 가지고 어느 쪽이 더 또렷하다 하는가!
한자가 뜻이 또렷하다고 하는 것에는, 보기를 들어 ‘화룡점정’ 같이 긴 얘기를 짧게 글로 쓴 것 같은 것도 들기도 하는데, 이 역시도 그에 얽힌 이야기를 모르면 오히려 더 뜻을 헤아릴 수가 없다.(오히려 한자가 가진 맛과 재미라면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긴 얘기를 짧은 글 속에 집어넣는 것. 하지만 이것은 한자라는 글자가 가진 장점이 아니라, 한자가 가진 단점 때문에 생겨난 문화로 보는 것이 옳다 본다. 그런 점에서라면 오히려 조금 길기는 하지만 우리말이 오히려 더 뜻이 또렷하다고도 할 수 있다.)
정말로 한자가 가진 장점 가운데 하나는, 상형문자에서 비롯되었다거나 뜻글자이기에 가지는 장점으로 아주 긴 뜻을 글자 하나에 넣는 것인데, 보기를 들면 이런 것이 있다.
‘壺'[호]는 ‘항아리병’이란 뜻인데 그냥 항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가리가 좁고 배가 넓은 항아리병'(혹은 ‘밑 넓고 아가리 좁은 항아리병’)을 말한다.
우리말로 하자면 ‘호리병’ 정도 되려나? 역시 그렇다 해도 세 글자보다는 한 글자가 짧기는 하다.
하지만 ‘호리병’이란 게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고서야 ‘호리병’이란 낱말을 안다고 해서 그 뜻을 알 수는 없는 것처럼, 한자 ‘壺’만 가지고는 그 뜻을 알 수 없는 것은 매 마찬가지다.
여튼 그것도 장점이라면 장점이랄 수 있겠으나 그렇게 치자면 내가 자주 보기로 드는 ‘뷁’이나 ‘즐’이 훨씬 뛰어난 말이 된다.
단 한자 가지고 그 긴 뜻과 느낌까지 담고 있으니!!!

‘한자가 뜻이 또렷하다’고 말하는 분들께 부탁드린다.
그런 보기를 좀 내게 알려줬으면 싶다.
그냥 어쩌다 있는 보기 하나가 아니라 뭉뚱그려 봤을 때(일반적으로 봤을 때) 그렇다고 할 수 있는 보기를!

우리말[한말] 한마당

* 얼숲에 올린 글 보기

* 덧. 우리말(토박이말) 가운데 적잖은 말은, 우리말이 뜻글자(저는 이런 때에는 오히려 ‘느낌글자’가 더 뜻에 가깝다 봅니다.)이기에, 말에 느낌을 실기에 오히려 우리말이 더 뜻이 또렷한 것도 많습니다.
‘사뿐사뿐’은 정말로 가벼운 느낌이 나고 ‘뻐근’은 정말로 뻑적지근한 느낌이 납니다.
물론 이는 같은 문화를 누리는 같은 겨레이기에 더한 것은 있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사뿐사뿐’에서 무거운 느낌을 받는 겨레는 많지 않을 것입니다.

한글 없이 살아 볼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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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를 즐겨 쓰는 세상으로 되돌아 가고 싶은 이들에게,

그들만 따로 모아, 한글은 조금도 쓰지 말고 한자만 가지고 살라고 해 보고 싶다.

당신들이 그렇게 떠받드는 한자라는 것, 한글이 없으면 얘기 나누기도 쉽지 않다는 걸 깨달을 머리는 없는 걸까…???

우리말[한말] 한마당

* 그렇게 한자가 뛰어나고 좋거든, 한글없이 한자로 글살이를 해라. 한글 끼워넣지 말고…   “한글이 니 씨다바리가?” ^^;;

우리 말글에 스며든 사대주의, 우리 역사에 스며든 사대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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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 말글은, 알면 알수록 이 나라 역사 만큼이나 웃기는 짬뽕이다.
우리가 요새 쓰고 있는 말글 잣대가, 한자를 떠받드는 이들이 만든 것이 많은데, 지어 ‘기역, ‘니은’하는 낱자 이름에도 이 그림자가 스며있다.
‘니은’같이 쓰는 닿소리 이름이, 튀게도 기역과 디귿, 시옷에서 다르게 적는 까닭을 아시는가?
1527년에 썼다는 “훈몽자회”에, 소리값을 한자로 빌어쓰다 보니 한자말로 나타낼 도리가 없는 ‘윽’, ‘읃’, ‘읏’을 한자를 빌어 ‘役’, ‘末'(‘끝’이라는 뜻을 본 땀), ‘衣'(‘옷’이라는 뜻을 본 땀)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을 좇아 요새도 ‘기역’, ‘디귿’, ‘시옷’이라 적고 있다고 한다.(덧붙여 밝히자면, 북조선*덧보탬에서는 ‘기윽’, ‘디읃’, ‘시읏’이라 적고 있다고…)

이 나라 역사에서 딴나라 떠받드[사대주의]는 자들을 몰아낼 수 있을까?
이 나라 말글에서 딴겨레말글을 떠받드는 자들을 몰아낼 수 있을까??

* 덧보탬. 혹 이 낱말을 듣고 속으로 뜨끔했다면, 이녘-‘당신’을 이르는 우리 고을말-은 생각이 치우쳐 있을 수 있으므로 스스로를 잘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 함께 보기 : 위키백과 – 한글 낱자

‘보하이만’? 얼빠진 사대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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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보하이만 원유유출 오염 범위 급증”
오늘 어느 언론 매체에 나온 글 제목입니다.
‘보하이만’이 어딜까요? 바로 ‘渤海灣’입니다. 산동반도하고 요동반도 사이에 있는 바다를 말합니다.(저 글에 따르면 ‘산동반도’와 ‘요동반도’도 다르게 불러야 하겠네요…)
‘渤’을 우리는 ‘발’이라 읽고 ‘海’는 ‘해’라고 읽습니다.
그런데 이 글자들을 모아놓고는 ‘보하이만’이라 읽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런 궁금증들이 생깁니다.

1. 왜, 우리에게 따로 읽는 법이 있는데 모아놓고는 다르게 읽나요?
2. 그럼 왜 ‘灣’은 중국 식으로 읽지 않습니까?
3. 그럼 ‘미국’도 ‘미국’이라 쓰고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오브 어메리카’라고는 읽지 않나요?(그리고 미국은 한자를 쓰지도 않는 나라인데 가끔 ‘美國’이라 쓰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4. 그럼 ‘황해(黃海)’는 ‘황해’라고 읽어야 하나요, 중국 식으로 ‘황하이’라고 읽어야 하나요?
5. 그 나라가 읽는 소리를 받들어 그렇다고 한다면 외국에 있는 많은 지명들을 왜 영어식으로 읽나요?(우리가 아는 ‘스위스’를 스스로는 ‘헬베티카’라 하고 ‘터키’는 ‘튀르키예’라고 한다 합니다. 그런데 또 영어식 소리 ‘롬’을 우리는 이탈리아 소리대로 ‘로마’(Roma)로 소리냅니다.^^)

저도 한 때는 그 말을 쓰는 사람들 스스로 소리내는 대로 적어주는 것이 좋다 생각했습니다.(지금도 여전히 그런 생각은 남아 있습니다. 이 얘기는 뒤에 다시 적겠습니다.)
하지만 모두를 보고 따져봐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식대로 한자를 읽는 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또 다르게 읽는다면 이건 너무 불편한 일일 뿐만 아니라 내 것 놔두고 큰나라 규칙도 따르겠다는 얼빠진 사대주의일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 식대로 규칙이 있다면 다른 나라 규칙은 잠시 잊어버려야 하며,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쓰는 한자와 한자를 읽는 법을 버리고 그들 규칙을 따르면 될 것입니다.
여기서 틀림없이 ‘하루 아침에 한자와 한자말을 쓰지 말자는 말이냐’는 어거지를 내놓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저는 하루 아침에 한자를 완전히 버리고 쓰지 말자고 주장한 적이 없습니다. 규칙을 그리 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것이 규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규칙만 그리 된다면 시간을 두고 저절로 풀릴 문제입니다.
또한 우리말에서 한자말을 버린다면 한자도 계속 ‘쓰고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여기서, 이 말을 ‘한자를 하루아침에 몽땅 버리고 안 쓴다’는 말로 부풀려 어거지를 쓰시는 분이 계시는데, 우리가 평소 말글살이에서 영어를 쓰지 말자고 한다 해서 아예 영어를 몰아내자고 하시는 분 계신가요? 생각 좀 하시고 딴지 걸어주세요~) 지금껏 쓰던 말들은 말글살이를 어지럽히지 않는 안에서 계속 써야겠지만 더 이상 배우거나 새로운 말을 만들고 쓸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위에서 제가 ‘그 말을 쓰는 사람들 스스로 소리내는 대로 적어주는 것이 좋다’고 한 것은 보기를 들어, ‘미국’에 있는 ‘Los Angeles’는 ‘나성’이나 억지로 우리식으로 ‘천사 시’ 같이 부르는 것이 아니라 ‘로스 앤젤레스’(어차피 말이란 것이 소리를 완전히 똑같이 적을 수는 없습니다.)라고 불러주는 것이 맞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일본’에 있는 ‘동경’(東京)도 ‘도꾜’라고 불러주고 중국(이것도 위 규칙대로 하자면 ‘쭝궈’ 정도가 맞을 것입니다.)에 있는 북경(北京)도 그들 식대로 ‘베이징’으로 불러주는 것에 뜻을 같이 합니다. 단 이렇게 하려면 우리가 ‘따로’ 한자를 쓰지 말아야 합니다. ‘東’을 ‘동’으로, ‘京’을 ‘경’으로 배워놓고 ‘東京’은 ‘도꾜’로 읽는다면 이는 참으로 어리석은 짓입니다. 아니면 한자를 쓰려면 한자는 그대로 한자로 읽어야 합니다. 어차피 우리는 ‘헬베티카’를 ‘스위스’라고 부릅니다. 마치 외국인들이 우리나라 ‘대한민국’(또는 ‘한국’)을 ‘코리아’로 소리내는 것처럼…(그들이 ‘Korea’라고 적고 ‘한국’이라 읽어주던가요?)
그래서, 어떤 분들은 우리가 읽는 방식, 우리 한자 읽는 법대로 읽고 소리내자는 분들도 계시고, 저는 글자에 얽매이지 말고 소리 내는 대로 따로 소리내자고 하는 것입니다.(물론 이렇게 했을 때, 처음부터 곧이곧대로 글자로 적을 수 없는 말을 글자로 적는 것이므로 여러가지 문제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어차피 이러나 저러나 생길 수 밖에 없는 문제입니다. 아마 한자말도 어쩌면 우리 한자 소리값이 옛날 어느 때 중국 어느 곳에서 소리내던 값과 비슷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서로 소리값이 사뭇 달라져 버린 것과 같다 봅니다.)

어찌되었건, 우리 식이 있는 한 우리 식대로 읽고 소리낼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가진 것을 내버리고 그들 식을 따를 것인지 분명히 해야 합니다.
한자말을 버리고 중국 식대로 소리내던지,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쓰는 한자 소리값대로 소리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자를 받드는 이들은 사대주의에 젖어 중국(‘큰나라’라고 바꿔도 됩니다.) 방식대로 읽고 싶어 하면서도 한자말도 결코 내놓지 못할 것입니다. 한자말을 버리는 것은 지금까지 한자가 누리고 있던 기득권을 포기하는 것이고 지금껏 억누르고 죽여왔던 한글, 우리말과 같은 위치에서 다시 겨룬다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한자말은 결코 우리말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그들도 알 것입니다.

덧글 1. 말글살이는 우선 편해야 합니다.(그보다는 먼저 뜻이 통해야 하지만 여기서는 좀 먼 얘기가 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말에는 우리 얼이 스며있으므로 우리 얼을 지켜야하고 사대주의, 권위주의 생각을 없애야 합니다.

덧글 2. 기사 제목도 ‘중국 발해만(혹은 ‘보하이만’), 흘러나온 원유 더 넓게 퍼져’처럼 쉽게 쓸 수 있을 것입니다.

덧글 3. ‘발해만’을 ‘보하이만’이라 읽는 것을 사대주의라 한 것은, 우리가 한자를 읽는 모[방식]를 두고도 또 그들 소리값대로 소리내는 것을 두고 한 얘기입니다. 만약 우리가 한자를 버린다면(이 말 또한 헛갈림이 많을 줄 압니다. 한자를 지금 당장, 완전히 버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쓰는 것 말고 더 이상 한자를 가운데 둔 교육과 삶을 그만 둔다는 뜻입니다. 좀 더 자세한 것은 댓글로 달아 주십시오.) 딴 겨레 말을 그 겨레 소리값에 가깝게 소리내어 주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얼숲에서, ‘한자교육’을 두고 ‘Yong-kwan Lee’ 님과 나눈 얘기(2011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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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숲에서, ‘한자교육’을 두고 ‘Yong-kwan Lee’ 님과 나눈 얘기(20110217)

이른바 ‘한글컨텐츠’(?)를 연구한다는 분이 가지고 계신 생각이 너무나 터무니없어 옮겨놓습니다.

Yong-kwan Lee 어떤 명분으로도 교육을 반대해서는 안됩니다. 자라나는 어린이들은 배울 수 있는 능력이 가장 왕성할 때, 그들이 배우는 것이 무엇이든 좋고 유용한 것은 모두 배워야 합니다. 그런일로 화제를 삼고 있는 것 자체가 우습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습니까?

Yong-kwan Lee 한자는 사물을 상형화하는 문자가운데 최고의 문자입니다. 지구상에 그와 같은 문자는 없습니다. 한글이 우수하지만 그것을 대치할 수 없습니다. 물론 한자는 결코 따라올 수 없는 장점을 한글이 가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물을 개념화하는데 있어서 한글과 한자는 서로 다른 영역에서 그 역량을 발휘합니다. 한자가 정적인데 비해 한글은 동적으로 움직이는 사물과 감정의 표현을 드러낼 수 있어서 정적인 한자가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세계를 표현하는 놀라운 기적이 곧 한글입니다. 그러나 한자가 나타내는 개념을 단숨에 정리하는 역량을 한글이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냥 어린이의 두뇌와 상상력을 개발시켜주기 위해서라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 우리네 교육의 현실인데, 일부러 그와 같이 역사가 깊고 우수한 문자세계를 배울 수 있는 역량이 뛰어난 시기에 기어이 막아야 한다고 하는 이유를 듣고 싶군요…

Yong-kwan Lee 교육정책에 머무르는 교육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교육은 정책으로 좌지 우지 될 대상으로 머물 수 없습니다. 정책으로 사람을 기른다고 생각하는 생각하는 사람들이 교육을 주장하다보니, 축사 짓듯이 학교에 학생 가둬놓고 사육하는 공교육 현장만 즐비하지 않습니까. 자라나는 두뇌의 사리분별을 위해서 선현의 슬기를 있는대로 다 전해줘도 모자라는 것이 부모가 원하는 교육일 것입니다. 학교에 가둬놓지 않고 보다 자유스러우면서도 교육의 경쟁력을 잃지 않고 있는 선진교육의 사례를 얼마든지 관찰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은 교육을 숭상하는 나라이므로 대통령이 좌우지 하는 교육부의 수장이나 정당이 좌지우지 하는 교육정책은 국가 와 국민을 기만하는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교육을 일반 산업정책과 같은 수준에 두고 정당이나 인물이 바뀔 때마다 정책이니 소신이니 하면서 흔들어 대는 것은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의 연속이 아닐 수 없습니다.

Yong-kwan Lee 말과 글은 소통의 수단에서 다름이 아닐 것입니다. 소통은 나와 다른 개체와의 교류입니다. 나와 다른 것에는 말도 있고, 뜻도 있고, 문자도 있고, 소리도 있습니다. 서로 다르지 않다면 소통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가 없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중국과도 북한말과도 영어와 다른 수많은 종류의 언어들과 소통하기 위한 방법을 배우는 것일 것입니다. 소통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은 어린 시절에 길러 주어야 할 귀중한 자산의 하나일 것입니다. 영양 이 불충분하면 비타민이라도 먹이는 것이 몸에다 하는 투자인데, 하물며 정신에 풍부한 상상력을 길러줄 수 있는 언어적 영양을 일부러 불충분하게 만들자는 주장은 사실 황당한 면이 있습니다. 이 세계의 사회에서 언어끼리 서로 어울리면 그 효과가 훨씬 크게 배가 되는 양상을 보여 줍니다. 예를 들어서, 동남아 국가의 하나인 타일랜드나 캄보디아나 인도네시아에서 한국사람이 잘 알지 못하는 그들의 문자으로 작성한 프로필을 가지고 소셜네트워크에 참여하여 친구가 되려는 제안을 받아 본 적이 좀 있습니다. 그럴 경우, 그들의 글을 알지 못한 것이 미안하다기 보다는 이런 무지한 경우가 있을까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것은 상대의 입장을 배려한 행동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면이 있습니다. 즉 읽히지 못하는 것은 소용이 없는 것이 될 뿐이지요. 아무리 좋은 프로필이나 생각을 전하고 싶어도 한글만으로 써야 한다는 주장으로 아프리카사람들에게 한글로 된 설명서를 줄 수 만은 없을 터이며, 소통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사는 사회에서는 더군다나 매너가 결여된 행동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서로 다른 말이나 글이나 말소리를 익히게 되면 그 만큼의 두뇌를 개발하는 세계가 열리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두뇌의 역량에 의한 지식은 자극과 상상력에 의해서 발달이 이뤄집니다. 커나는 자녀들의 두뇌를 일부러 마비시키거나 미숙한 채로 발달을 방치할 수 있는 여지는 없애는 것이 교육의 본질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