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에 살아있는 말가락(억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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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時]하고 얽혀 ‘이르다’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때나 곳에 닿다’는 뜻과 ‘어느 때보다 앞서다’는 뜻입니다.(그리고 ‘말하다’는 뜻을 가진 ‘이르다’가 하나 더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다른 꾸미는 말과 함께가 아니라면 그 뜻이 무엇인지 또렷치 않습니다.
그런데 바탕낱말만 가지고도 뜻을 가려 쓸 수가 있습니다.
‘때나 곳에 닿다’ 할 때 ‘이르다’는 중간 높이에서 더 높아졌다가 떨어지는 소리 가락이고, ‘어느 때보다 앞서다’ 할 때 ‘이르다’는 높은 데서 차례로 낮아지면서 나는 소리입니다.(그리고 ‘말하다’는 뜻의 ‘이르다’는 중간 높에서 매우 높아졌다가 떨어지는 소리 가락입니다.)
이처럼 우리말에는 소리 가락이 있어 말을 가려 쓸 수가 있습니다.
몇몇 고장에서 소리 가락 규칙성이 뒤죽박죽이 되거나 별로 안 가려 쓴다고 해서 있는 것조차 없는 듯이 쓰는 것은 (비록 약해지긴 했지만)우리 말이 가진 성질을 애써 없애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지금도 제주 말과 경상도 일부에 남아있는 아래아 소리값을 17세기에 이미 없어졌다고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없는 규칙성도 살려서 우리말을 살려야 할터인데 있는 것조차 없다 치고 연구를 않으니…
우리 스스로 저지르는 우리말 죽이기는 언제까지 이어질런지……

  • 이 글에서 쓴 ‘(말)가락’ 혹은 ‘억양’은 우리가 흔히 아는 한족말 ‘성조’를 갈음하는 우리말이기도 하면서, 한족말 ‘성조’는 주로 소리의 높낮이 만을 이르는 말이지만, 말가락과 억양에는 소리 높낮이 뿐만 아니라 완급 같은 여러가지가 포함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한족말 ‘성조’를 우리말로 옮길 때는 ‘말가락’이나 ‘억양’이라 해야 옳습니다.

차와 커피 – 문화가 사람에게 스미는 길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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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확실히 커피가 대세로 자리잡은 모양입니다. 심지어 절에 계신 스님도 커피를 내준다는 말도 있으니…^^
저는 제 동무들과 만나면 ‘차’를 가끔 마시는데, 과연 문화라는 측면에서 ‘차’와 ‘커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서양 것이다 보니 좀 더 있어 보이고 한 것도 커피를 더 널리 마시게 된 까닭도 없지 않다고 봅니다.
하지만 ‘커피’라는 ‘문화’가 널리 퍼질 수 있었던 데에는 충분히 그럴 만한, 그리고 그럴 수 밖에 없는 까닭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먼저 우리에게 있어 ‘차’와 ‘커피’를 한번 견줘 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차’라 하면 아마도 ‘다도’부터 떠올리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물론 제가 제 동무들과 차를 마실 때는 결코 그렇게 마시지 않습니다. 그냥 술 마시듯이, 커피 마시듯이 마십니다.)
차의 ‘밍밍함’과 함께 이런 절차가 차를 사람들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큰 까닭이 된다고 봅니다.

그에 견줘 ‘커피’는, 우선 우리는 가짜 커피(이른바 인스턴트 커피)를 통해 ‘커피’라는 이름-알맹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봅니다. 어릴 때 먹던 ‘소시지’와 진짜 ‘소시지’가 결코 같지 않듯이 커피 맛과 향을 낸 것과 진짜 우려낸 커피는 같다고 하기 어려운 것처럼…-을 익혀 왔고 요즘은 이런 저런 통로를 통해서 우려낸 진짜배기 커피를 맛 볼 기회가 많아졌고 그러다 보니 커피의 참맛을 느끼고 찾을 가능성이 그만큼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하다못해 저만 해도 옛날에는 커피-물론 그 때는 인스턴트 커피-를 거의 마시지 않았고 가끔은 배탈까지도 나고 그랬습니다만, 요즘은 쓰거나 맛이 색다른 커피도 제 나름의 맛을 느끼곤 합니다.(제 나름의 맛을 느낀다는 뜻이지 그렇다고 품평을 할 만큼은 못 됩니다만,…)
그리고 커피를 마시다 보면 커피콩에 따라, 볶는 법에 따라, 물을 내리는 방법에 따라서 서로 다른 맛을 낸다는 것에 흥미를 느끼고 나 역시도 한번 내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여러가지 기구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러다 보면 볶는 법이나 생산지까지 따지게 되고… 그렇게 관심을 넓히고 깊게 만들어 가게 됩니다.

이것을 ‘차’에 맞춰 보면, ‘다도’같은 턱도 없는 절차 같은 데에 얽매이지 않고, 마치 ‘인스턴트 커피’ 같은 엉터리 차도 좀 있고, 중국처럼 아무 때나 마시는 것으로 느끼다 보면 엉터리 차와 진짜배기 차의 차이를 느끼기 시작할 테고 그러다 보면 차 종류에 따라, 생산지에 따라, 우리는 방법에 따라 서로 다른 맛이 나고 심지어는 차마다 몸에 미치는 약리 작용이 서로 다르다는 것까지 알다보면 차를 물처럼, 약처럼도 마시게 될 것입니다.
결국은, 차를 너무 정통을 지키고 질을 지키려고만 하기 보다는 널리 마시다 보면 차를 느끼는 문화도 더 깊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커피도 마찬가지지만, 그것이 몸에 안 맞거나 입에 안 맞는 사람을 빼고는 차를 마시다 보면 차 역시도 내 취향도 있고 나름의 맛과 향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확실히 ‘커피’는 ‘차’에 견줘서는 젊은 사람 쪽이 더 좋아 할 만한 강렬함(?)이 있지만, ‘차’는 마치 동양화 같은 여백과 은은함이 있습니다.(가끔은 차에 따라 나름의 강렬함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만,…)

이런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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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에 한번 쯤….
보기를 들어서, 서울 사대문 안에 ‘차 없는 날’ 같은 거 어떤가?
적잖은 사람들이 불편하다 투정하겠지만,
하루 정도는 그런 여유를 가져보는 것도 좋지 않겠나?

이제 좀 여유롭게, 사람 사는 것처럼 살아 보자.^^

핑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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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슬픈 데에
핑계는 있을지언정
‘까닭’은 없다.

#깨몽생각

꼭두놀음[꼭두극;인형극]을 보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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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9월 스무엿새에 마지막으로 고침.

  • 흔히 이르는 ‘인형극'[꼭두놀음]을 두고 해 온 생각을 가지런히 해 볼까 합니다.(꽤 긴 글이 될 것 같습니다.)

쭉 덧붙이고 있습니다. 부디 이 글이 ‘꼭두놀음’ 바닥이 한 걸음 뜀 뛰는 기틀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글에 대한 어떠한 댓거리도 반깁니다. 고맙습니다.

# ‘인형’의 뜻매김을 두고

‘인형’(人形)은 글자 그대로 보자면 ‘사람 모양을 한 물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말이란 것이 본디 뜻 대로만 쓰는 것은 아니니 굳이 ‘사람’ 모양이 아니더라도 ‘인형’이라 쓸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짐승 모양 장난감 같은 것도 ‘인형’이라고 부르고 있다.(이와 매우 비슷한 경우로, 우리말로 ‘고니’라는 새를 일본 한자말을 써서 ‘백조’라고 부르고 있으나 그 한자 뜻하고는 다르게 검은 색도 있는 바, 이런 때에는 ‘흑백조’라는 아주 이상한 이름으로 부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요즘 예술 흐름에 따르자면 온갖 물체(오브제)를 쓰는 인형극[꼭두놀음;puppetry]도 있는데 그 물체[프랑스말: Objet]를 ‘인형’이라 부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다 보니 ‘인형극'[꼭두놀음]의 큰 영역을 차지하는 것은 ‘인형극’에 끼지 못하고, ‘인형극'[꼭두놀음]이라고 하기에는 흐릿한 영역이 ‘인형극'[꼭두놀음]에서 임자[주인] 행세를 하는 형편이 되는 것이라 본다.
아울러,

# ‘인형극’ 뜻매김과 이름을 두고

한국에서 공연되고 있는 ‘인형극'[꼭두놀음]은 옛 전통 우리 ‘꼭두각시놀음’과는 얽힘 없이 시작했다고 봐야 하지만, 사실 우리 전통 ‘인형극'[꼭두놀음]이 없었던 것도 아닌 바, 우리 전통 ‘인형극'[꼭두놀음] 뿌리를 찾고 이어 내는 것도 필요하다고 본다.

‘인형극'[꼭두놀음]은 ‘ 꼭두를 사람이 사람이 손수 조종하여[놀면서] 연출하는 공연 형태’위키백과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손수’+’조종하'[놀]지 않는 것은 ‘인형극'[꼭두놀음]으로 볼 수 없다는 생각이다.(여기에 덧붙여, ‘꼭두’와 ‘대잡이'[꼭두 조종자]의 비중도 조금 살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꼭두’ 비중이 훨씬 크다면 ‘인형극'[꼭두놀음]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꼭두’와 ‘대잡이’ 비중이 비슷해 지기 시작한다면 아무래도 ‘꼭두’가 ‘대잡이’에 쏠려 보일 수 밖에 없지 않나 싶다.)

‘인형극'[꼭두놀음]을 갈음할 이름들을 살펴 보면,

  • 인형극 :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인형’이란 뜻매김과 ‘인형’이라는 낱말에서 느껴지는 느낌-‘모양꼴'[형태]에 얽매일 수 밖에 없는-과 요즘 예술공연 흐름까지 생각했을 때 흠이 많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본 뜻을 우리 전통에서 찾아 되살릴 뿐만 아니라 새로운 흐름까지 감안했을 때 아래 이름으로 고쳐 부르는 것이 좋다고 본다.
  • 꼭두각시놀음 : 옛날 남사당패가 놀던 놀음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전통 예술에서 지금의 인형극[puppetry]에 걸맞은 이름.
  • 꼭두놀음 : 사실 ‘꼭두각시놀음’과 같은 뜻지만, ‘꼭두’라는 낱말의 뜻을 돋게 하고 또 전통놀이인 ‘꼭두각시놀음’과도 구분하며 말 흐름새도 따져 붙인 이름.
  • 덜미 : ‘꼭두각시놀음’과 같은 뜻인데 남사당놀이에서 꼭두각시를 덜미를 잡고 놀았다는 데서 나온 말.
  • 허재비놀음, 허깨비놀음, 허수아비놀음 : ‘꼭두’ 또는 ‘꼭두각시’라는 것 또한 ‘인형’과 별다를 게 없다고 하는 이들의 주장과 더불어, 일정한 모양이 없는 오브제[프랑스말: Objet]까지도 생각해서 ‘허재비놀음’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아다시피 ‘허재비’는 스스로는 움직이지 못하는 ‘허수아비’를 이르기도 하고, 실체가 없는 것이란 뜻으로 ‘허깨비’와 비슷한 뜻으로도 쓴다.)

저는 가끔 쓰는 이들도 있는 ‘꼭두놀이'(‘꼭두놀음’이 좀 더 알맞은 이름이라 봅니다.)이나 ‘허재비놀음’에 새로운 뜻까지 담아 쓰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 ‘인형극'[꼭두놀음]의 테두리

한국에서는 이른 바 ‘인형’이라고 부를 만한 것으로 하는 공연을 모두 ‘인형극’으로 부르기도 하는 현실이다.(이마저도 주체가 어느 쪽에 붙고 싶으냐에 따라 인형극으로 붙었다가 아닌 것으로 우겼다가 하는 실정이라고 본다.)
이는 공연예술 가운데서도 ‘인형극'[꼭두놀음]이라고 부르는 영역을 깊이있게 연구하고 서로 공유하는 일이 적다 보니 그냥 적당히 아무렇게나 그렇게 부르고 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인형극'[꼭두놀음]의 테두리를 또렷히 하기 위해서는 위에서 처럼 ‘인형극'[꼭두놀음] 이름을 또렷히 매기고 나서

꼼꼼하게 봐서 ‘인형극'[꼭두놀음]을 뜻 매김해 보자면,(좁은 뜻의 ‘인형극'[꼭두놀음])

흔히 장치에 의해 움직이는 오토마타는 사람이 직접 조종되는 것이 아니므로 인형극[꼭두놀음]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인형탈을 쓰고 연희를 하는 경우 이것을 인형극으로 볼 것이냐 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탈인형극, 탈연극, 탈극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탈극의 경우에는 탈을 쓴 배우나 탈인형이 극을 이끄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만, 조종자가 조종한다기보다는 사람(배우)의 움직임을 표면적으로 보여줄 뿐이라는 점에서 인형극이라 하기 어렵다는 주장이 있다.
단, 퍼레이드나 극에서 대형 인형 속에 사람이 들어가서 조종하는 경우에는 사람이 직접 조종을 통하여 표현해 내므로 인형극으로 본다.

입체적인 혹은 평면적인 인형을 가지고 놀면서 구연(口演) 등을 하는 경우다.

이 경우에도 인형이 연희에 참가한다기 보다는 단순히 스토리 전개에 이용만 되기 때문에 인형극으로 보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이와 비슷하지만 팔, 다리나 입을 조종하여

인형을 단순히 연희의 한 소품으로 쓰는 경우다.

이 경우에는 ‘인형연극’으로 구분하여 부르기도 한다.
인형 연극의 경우에는 인형이 연희에 좀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는 하나 배우이자 조종자인 사람이 주이고 인형은 표면적인 역할만 하기 때문에 인형극으로 보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물론, 예술 테두리를 칼로 자르듯 자를 수는 없는 일이라 위와 비슷하더라도 얼마나 조종하는 부분이 들어갔느냐에 따라 넓게 봐서 ‘인형극'[꼭두놀음]으로 보아야 하는 일도 있을 것이다.

# 꼭두놀음 공연을 두고

대잡이가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

가끔 일부러 대잡이를 드러내거나 혹은 대잡이가 또다른 공연 주체로 참가하는 수가 있기는 하나, 대체로 대잡이는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고 본다.
이를 위해 대잡이를 검은 막을 덮어 쓰거나 하는 일도 있으나 이도 괜찮은 수이기는 하나 특히 대잡이가 배우로써 바탕이 되어 있다면 굳이 몸을 가리지 않더라도 보는 이의 눈길이 꼭두에 머무를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본다.(그런 점에서 ‘Duda Paiva’ 공연은 무척 좋은 본보기라고 본다.) (옛날에는 제 분야만 제대로 하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요즘에 들어서는 대잡이도 배우로써의 바탕을 다진 다음에 다른 구실을 맡는 것이 큰 흐름이며 바람직한 일이라 본다. 심지어 말로써 웃기는 우스개꾼[코메디언]들도 배우로써 바탕을 다진 배우들은 다를 수 밖에 없더라…)따라서 ‘대잡이가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대잡이가 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대잡이를 느끼지 못하도록 꼭두의 비중이 커야 한다는 것이다.(하지만 안타깝게도, 특히 연기를 했던 배우가 대잡이로 나서는 경우에, 꼭두를 누르고 대잡이에게서 기가 느껴져서 꼭두놀음이 아니라 공연에 꼭두가 소품이 되는 버리는 꼴인 일이 흔히 벌어지는 게 현실이다. 꼭두놀음 바닥이 이런 것도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꼭두 대잡이들부터 연기 공부를 하셔야…^^;;)

꼭두놀음의 고갱이는 ‘보람'[상징]이다.

모양꼴에 집착하게 되는 ‘인형극’이라는 이름을 ‘꼭두놀음’처럼 바꾸자고 하는 것도 꼭두놀음의 고갱이를 살리려는 까닭도 있는데, ‘인형’이라는 모양꼴에 집착해서는 ‘꼭두놀음'[인형극]이 폭넓고 깊은 예술 갈래가 되기 어렵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것이 가장 도드라지게 드러나는 것이 ‘오브제 꼭두’라고 보는데, 오브제 꼭두를 두고도 만든 이의 보람[상징]이 제대로 전달되고 또 보는 이도 거기서 끝없는 상상이 가능해야 한다고 보는 바, 그렇지 못하고서는 (있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사진 만이 예술’이라고 우기는 것과 같다고 본다.
거진 모든 예술 갈래가 그렇듯이 보람[상징]이 풍부한 예술…

# 그 밖에 꼭두놀음에서 흔히 보는 어설픔

꼭두를 흔들어서 움직인다고 꼭두놀음이 아니다.

특히 아마추어 꼭두놀음패[인형극단]에게서 자주 보는데, 그냥 대충 흔들어서 조종하면서 그것을 스스럼없이 ‘꼭두놀음'(인형극)이라고 하고, 그러다 보니 꼭두놀음은 마치 아무나, 대충 하는 것처럼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 꼭두놀음 바닥이 서둘러야 할 일들

– 뜻 매김과 공유

– 자료를 정리해서 볼 수 있는 얼개 – 도서관이던지 누리집이던지, 데이터베이스던지…

– 꼭두놀음을 제대로 팔아 줄 수 있는, 조금 전문 지식을 가진 공연기획자와 꼭두놀음 공연을 이어주는 얼개

 * 고리낱말 : 인형극, 꼭두극, 어떻게, 하는 법, 만드는 법,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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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나는,…

참말로 생각’하’며 살고 있을까,

생각한다고 생각’되’며 살고 있을까…

 

https://www.youtube-nocookie.com/embed/zcv7WMts1T0?rel=0

우리는 왜 스스로 살아가지 못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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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앞서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조선 뒤로 우리 겨레는, 역사는 말할 것도 없고 내가 눈여겨 보는 말글에서조차 우리 스스로 홀로 해나가는 일이 거의 없었다.
이러면 당장 ‘훈민정음’을 들이밀며 대들 분이 계시겠는데, 나는 조선 뒤로 우리 역사에서 가장 생뚱맞은 일로 첫째가 세종임금이요, 둘째가 노무현 님이 나라마름이 된 일이라고 본다.
게다가, 훈민정음이야 그 빼어남이 비길 데가 없어 지금껏 살아남기는 했으나 기 훈민정음이 널리 쓰인 것은 오히려 나라를 잃은 일이 큰 디딤돌이 되었다고 본다.(나라가 어지러워지고 또 나라를 뺏기면서 그 동안의 권위가 흔들리고 또 나라 잃은 설움이 오히려 우리 것을 돌아보게 하는 까닭이 되었다는 것이다.) 훈민정음이 조선 때 겪은 일로 미루어 보자면, 조선이 지금껏 이어져 왔다면 지금 쯤은 훈민정음 사용 금지령이 내렸거나 기껏 무지랭이들이나 쓰고 잇지 않을까?  조선 때처럼…(어차피 지금도 조선시대 2부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새로운 말이 필요하면 마치 조선 때 새 왕이 지나에게 윤허를 받듯 지나 한자말을 가져오더니 가까운 때에 들어서는 일본 한자를 가져다 쓰다가 요즘은 서양말을 그대로 가져다 쓰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그것이 본디 우리 것이었는 양 서양말로 말을 지어가며 말글살이를 하고 있는 지경이다.(아주 옛날에도 한자로 말글을 지은 적이 있지만 그 때는 마땅히 우리 글자가 없어서라고 핑계라도 댈 수 있었지만,…)
모든 문화가 그렇지만 말글도 버릇인지라 쓰다보면 몸에 익고 또 스스로 더욱 나아지는 것이다. 그런데도 뛰어난 말글을 가지고도 애써 발전시키기는 커녕 널리 쓰지조차 않으면서 못 났네 불편하네 불평부터 늘어 놓으니…
그러면서 좀 낯선 우리말을 쓰거나 우리말 뿌리에서 뽑아 새 우리말이라도 만들라 치면, 온갖 핀잔과 공격을 해 댑니다.(요즘도 최현배 님이 ‘날틀’, ‘배꽃여자배움터’라고 내놓은 것을 두고 욕을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최현배 님은 내놓기만 했을 뿐 그걸 강제할 힘도 없거니와, 큰나라말 떠받들고 우리말 죽이는 국립국어원이 부리는 억지가 훨씬 큰 영향을 미침에도…)

어차피 뭇사람 피를 빨아먹고 사는 이들은 세상이 고르고 편해지기를 바라지 않는다.(저 죽을 짓을 왜 하려 하겠는가!) 그렇다면 세상의 바탕을 이루는 사람들이 스스로 쉽고 고른 것을 찾아 써야 한다. 쉽고 편한 말글을 쓰고 쉬운 말을 만들고 어려운 것을 쉽게 고쳐 써야 한다.
갓 말글을 배운 아이나 나이 많은 어르신이나, 많이 배운 이나 배움이 짧은 이나, 심지어 새로 우리 말글을 배우는 이조차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말글을 쓰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 첫걸음이요 소통이다.

쉬운 말글이 민주주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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